내겐 특별한 친구가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고인돌’이다. 다른 이름으로 ‘지석묘’라고도 한다. 청동기시대에 태어났으니 나이는 얼추 3000살이다. 지금 그가 사는 곳은 ‘경남의 강남’이라 불리는 창원유흥중심지역 번화가의 한복판이다. 그의 집엔 ‘창원 상남지석묘’라는 문패가 달려있다. 사람들은 이 집을 ‘고인돌 공원’이라고도 부른다. 땅값이 평당 수천만 원씩 하고 유흥주점과 상가들이 즐비한 빌딩 숲 사이에 왜 그의 집이 자리 잡았을까. 내 친구 ‘고인돌’과 처음 만난 건 15년 전이다. 당시 불어닥친 도시개발 열풍 때문에 그가 3000년간 살아온 터전을 잃고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회부 기자로 일하던 나는 그 사연을 신문기사로 썼고, 그 덕분에 그는 지금 그 자리에 남게 돼 도심속 시민들의 쉼터와 역사교육장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내게 짜릿한 특종의 맛과 함께 기자라는 직업의 긍지를 느끼게 해주었다. 그러니 나도 그가 고맙고, 그도 내가 고마울 수밖에.
오늘도 신문사 일을 마치고 한잔 하러 길에 그가 사는 ‘고인돌 공원’을 지나며 눈인사를 나눈다. “친구! 잘 지냈는가” “허 기자! 덕분에 잘 산다네.” 마음으로만 오가는 대화이지만 3000년이란 나이 차이를 잊게 해준다. 그리고는 새삼 그와 처음 인연을 맺은 그날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긴다.
고인돌과 기자의 첫 만남 지난 1999년 4월13일. 입사 후 7년 정도를 편집기자로 일하다가 취재부서로 자리를 옮긴 지 9개월째. 몇 달간의 문화부 생활을 거쳐 사회부로 발령 받아 며칠 되지 않았을 때다.
“허 선배, 밖에 일을 보러 갔다오다 보니 창원경찰서에 돌칼 등 청동기시대 유물이 분실물 신고가 돼 있던데요.”
편집부 후배 기자가 내게 “경찰서 게시판에 청동기시대 유물의 주인을 찾는 내용의 안내문이 붙어있더라”고 말해줬다.
“도굴꾼들이 차에 싣고 가다 떨어뜨렸나?”
경찰서는 회사에서 걸어서 5분 거리. 사실 확인을 위해 찾아간 경찰서 안내판에는 후배 말대로 마제석촉 등 유물들의 주인을 찾는 안내문이 붙어 있었다.
담당 경찰관은 “유물을 누가 잃어버린 것이 아니고 발굴 문화재 등은 법절차에 따라 신고하도록 돼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발굴장소를 물으니 재개발이 진행 중인 창원 상남시장 터란다.
평소 잘 아는 곳인데다 경찰서 근처라 바로 현장으로 갔다. 8만8000여평의 거대한 땅, 그곳엔 일반인의 출입을 막기 위해 철제벽이 세워져 있었다. 벽을 따라가니 출입구가 있었다. 광활한 부지에 곳곳에 철거 과정에서 발생한 건축폐기물 더미들이 보였다. 그중 한 곳에 큰 바위 주변으로 통제를 위한 선이 둘러쳐져 있고, 한쪽에는 수천 점의 토기 조각들이 바닥에 드러난 유적지가 있었다.
그러나 유적에 대해 물어볼 사람이 없었다. 공사 작업자에게 물으니 국립창원문화재연구소에서 발굴 작업을 한단다. 하늘이 취재를 도와주려고 그랬는지 문화재연구소는 우리 신문사 근처에 있었다. ‘발로 뛰는 기자’가 될 수 있었다.
소장을 만나 상남상업지역 일대가 BC 5세기 청동기시대 유적지였고, 이곳에서 지석묘 2기와 홍도(紅陶·붉은간토기), 마제석촉 등 유물 22점이 발견됐음을 확인했다. 특히 지석묘는‘이중하부구조’의 보기 드문 형태로 우리나라 지석묘 변천과정 연구에 중요한 사료라는 사실도 알게 됐다.
“상남시장 터에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네!” 창원시내 중심지에다 5일장이 열리면 사람들로 북적이던 상남시장 터가 수천 년 전에도 사람들이 살던 곳이었다는 사실은 관심을 끌만한 기삿거리라고 판단했다.
이날 확인한 내용으로 기사를 쓰고, 사진부에 의뢰해 유적지 사진도 찍어 송고했다. 다음날인 4월 14일자 1면에 센터기사로 보도됐다.
특종이었다. 기사를 쓴 지 1년도 안된 초보 취재기자에게 찾아온 행운이었다.
“야, 재미있네. 상남시장 터에서 청동기시대부터 사람이 살았다고!” 신문이 인쇄되자 선후배 기자들부터 관심을 보였다.
신문이 배달된 후 추가 취재를 위해 창원시의 관련 부서를 찾아가니 온통 유적지 얘기들이었다. 당시 시청 출입을 하던 사회부 선배 기자가 “우리 신문 보고 시청 출입기자들이 모두 현장으로 달려갔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신문을 본 친구들에게서도 축하 전화가 왔다. 취재기자로 활동하면서 처음 맛보는 기쁨. 모두가 나를 주목하는 느낌이었다.
이 과정에 시의 문화재 담당 공무원은 내게 “유물발굴과 관련해 경남신문에만 보도자료를 준 것으로 타사 기자들이 오해해 자신이 심하게 곤욕을 치렀다”고 하소연했다. 그는 “유물 발굴과 관련해 작년 말에 보도자료를 냈을 때는 제대로 다뤄주지 않더니 보도자료를 내지도 않은 이번엔 왜 이러느냐”며 기자들에게 되레 따졌단다.
담당 공무원 말대로 이 지역 유적지 조사는 97년과 98년 이미 두 차례나 실시됐고, 그 결과는 우리 신문에도 실려 있었다. 그러나 이 기사는 문화면에 1단짜리로 취급돼 주목을 받지 못했다. 사실 나도 그 기사를 못봤다. 기자가 어떤 시각으로 기사를 쓰고, 편집되느냐에 따라 반향이 엄청나게 차이가 날수 있음을 실감했다.
현장보존이냐, 이전보존이냐 취재 과정에 지석묘 유적 보존을 두고 재개발사업을 진행 중인 창원시와 지역 사학자들의 의견이 다르다는 것을 알았다.
창원시는 발굴된 지석묘를 상남상업지구 내에 조성되고 있는 공원지구로 옮겨 보존할 방침인데 반해 지역 사학자들은 “지석묘가 국내에서는 보기 드문 형태이고 역사적 가치가 높으므로 발굴된 장소에 현장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첫 기사가 나간 다음 날 ‘창원 상남시장 청동기 유적 주목 이유’란 제목으로 신문에 취재기자가 된 후 처음으로 ‘기자수첩’을 적었다. 기자수첩을 통해 유적의 발굴 의미와 함께 유적을 현 위치에서 보존할 경우 공사 완료 후 고층건물 속의 미관상 문제, ‘무덤’ 이미지로 인해 주변 상권에 나쁜 영향을 미 칠 수 있다는 점, 유적 현장보존을 통해 도심 속의 역사교육장으로 색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는 점 등 양측 주장을 언급했다.
이 과정에 시가 유적 발견지역을 이미 개인들에게 분양한 사실이 드러났다.
기사를 써 ‘상남동 지석묘 유적지 이미 분양’이란 제목으로 보도했다.
≪…… 상남시장 재개발지역 총 184필지(1필지 250~300평) 중 107필지가 96년 10월에서 97년 4월 사이에 분양됐고, 여기에 유적 발견지역도 포함됐다. 유물 발견으로 공사가 중단된 지역은 개발계획도상 도로 등을 포함해 모두 480여 평인데 도로부분을 제외한 나머지 부분들은 4필지로 나뉘어져 4명에게 평당 400만원가량에 분양된 상태다.……≫
“ 허 기자, 밤길 조심해야겠어.”
기사가 나간 후 취재 과정에서 알게 된 지역 사학자가 기자를 걱정하며 한 말이다. 유적이 발견된 땅을 분양 받은 이들은 물론, 유적지 주변 땅 주인들도 기자를 좋게 보지 않을 것이란다. 시 공무원도 “유적지 땅을 되돌려 받기 위해 분양받은 사람들에게 다른 부지와의 교환 등을 제시했지만 전혀 반응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유적의 보존은 공식적인 논의 과정을 통해 결정돼야 한다는 생각에 취재를 계속했다.
잇단 보도를 통해 유적 보존 위치가 공론화되자 경남도 차원에서 이를 결정하기로 하고 행정부지사를 위원장으로 도문화재위원회가 열렸다. 그러나 5월 20일 열린 도문화재위원회에서는 보존 위치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도문화재위원회는 이날 회의에서 유적 보존은 발굴허가를 내준 문화재관리국(1999년 5월 정부조직개편에 따라 문화재청으로 승격)에서 처리하는 것으로 한다고 결정했다.
그후 한 달여 만에 지석묘를 현장 보존하라는 문화재청의 결정이 내려졌다. 문화재청은 6월 30일 ‘상남지석묘는 국내에서 그 유례를 찾아보기 힘든 특이한 구조와 원형을 잘 간직한 중요한 유적임을 감안해 현지 원상복원 조치토록 하고, 5호 석곽은 인근 공원지구 내로 이전 복원해 보존하라’고 시에 통보했다. 첫 기사가 나간 지 두 달여 만에 유적의 보존 위치가 최종 결정됐다. 상남지석묘는 경상남도 기념물 제224호로 지정됐다.
문화재청의 결정 기사가 신문에 실린 후 내가 제대로 기자 역할을 해낸 것 같아 가슴 뿌듯했다.
보도 그 후… 그로부터 몇 년 후 여름. 유흥시설이 제법 들어선 고인돌 공원 주변에서 술을 마신 후 택시를 탔다. 차가 공원 옆을 지날 때 술김에 ‘내가 만든 공원’을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기사에게 공원을 어떻게 생각 하느냐고 물었다.
“시가 돈 들여 저걸 왜 만들었는지 모르겠어요. 고인돌이 번화가인 이곳과는 어울리지 않고, 풀이 무성해 모기까지 버글버글하는데….”
내 얼굴이 굳어졌다. 그랬다. 당시 그곳은 전체가 철제펜스로 둘러쳐져 있고, 풀에 가려 고인돌도 잘 보이지 않았다.
이후 고인돌 공원은 깔끔하게 정비가 됐다. 유적 보호를 위해 두 유적의 바로 옆에만 펜스를 치고 그외 지역은 사람들이 다닐 수 있게 만들어졌다. 유적 주변 바닥도 석재로 꾸미고 주변엔 나무도 심었다.
‘고인돌 공원’이라는 이름도 시민들에게 익숙해졌고, 바로 옆에 쉼터 역할을 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돼 거리 공연 등이 열리기도 한다.
8년 전 쯤부터 취재부서에서 편집부로 옮겨 일하고 있다. 가끔 학생들 견학 안내를 한다. 이때 학생들에게 고인돌 공원의 취재과정을 들려준다. 세상과 지역을 위해 기자 한 명이 기관이나 단체가 하는 것 보다 더 큰 역할을 할 수 있다며.
최근 고인돌 공원을 갔다가 안내판을 봤다. ‘………지석묘 1기와 석관묘 1기를 현재의 위치로 옮겨 원상태로 복원……역사교육장으로 정비하였다.’
깜짝 놀랐다. 현장보존된 고인돌이 현재의 위치로 옮겨왔다고? 그럼 이전했다는 말인가?
당시 부지조성 업무를 맡은 창원시 공무원의 연락처를 찾아 전화를 했다. 10여 년이 지나 그도 보존 위치에 대해 정확하게 기억하지 못했다.
그는 “유적 현장보존을 위해 당시 부지를 분양받은 사람들에게서 돈을 돌려주고 어렵게 땅을 되돌려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 시 문화재 담당자 연락처를 알려줬다.
그러나 시 담당자도 유적의 이전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담당자가 알려준 당시 유적 발굴 관계자에게 전화를 했다.
“발굴지로부터 30~40m 옮겨졌지만 그 정도는 현장보존이라고 보면 됩니다.” 이 말을 듣자 놀랐던 마음이 진정됐다.
그는 “엄밀한 의미의 현장보존은 유적을 땅에 그대로 묻는 것을 말한다”며 “이곳은 재개발로 인해 유적 주변의 땅 높이가 높아지는 등 변화가 생기므로 유적을 해체해 최대한 그 자리와 가깝게 보존한 것을 현장보존으로 보면 된다”고 설명했다. 그는 “그곳은 돌 하나하나에 숫자를 붙여 옮겼을 정도로 보존 처리를 잘한 곳”이라고 했다.
최대 최고 최초는 아니지만…
≪기자들이 유적지 발굴현장을 방문할 때 물어보는 세 가지 말이 있다. 최대 최고 최초라는 이른바 ‘3최’. 이번 창원 상남시장 터 청동기유적은 이런식의 ‘3최’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기자가 된 후 처음 쓴 기자수첩의 글머리다. 여기 나오는 ‘3최’를 내게 이야기해 준 사람은 당시 발굴 단원이었다. 취재이야기 공모 글을 쓰기 전에 통화한 발굴단원 중 그와도 통화를 했다.
“경남신문 허철호 기자입니다. 상남시장 고인돌유적 보도했던 기자인데요. 저 아시겠습니까”
“오래전 일이니 제가 이름을 기억한다고 하면 거짓말쟁이가 될 테니, 죄를 짓는 것이 될 테고, 그래도 안다고 해두죠. 그때 생각하면 기자라는 사람이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몇십억짜리 비싼 땅에 고인돌이라는 문화재를 보존할 수 있었으니 말이죠.”
참 많은 시간이 흘렀다. 편집과 취재부서를 오가며 기자 생활을 한 지 23년째. 그동안 기자로서 많은 이들에게 기억될 만한 3최에 해당될만한 기사나 편집작품을 만들지는 못했다. 정년도 몇 년 남지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기자라서 행복하다. 기사를 쓸수 있고, 편집할 수 있으니까. 내 친구 ‘고인돌’도 이런 내 마음 알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