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르헨티나 대통령과 보수언론의 힘겨루기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3.11.06 15:15:56
|
 |
|
|
|
▲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
|
|
아르헨티나 사상 첫 선출직 여성 대통령인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와 보수언론의 대표주자인 ‘그루포 클라린(Grupo Clarin)’이 수년째 공방을 계속하고 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이 정권 차원에서 보수언론 약화를 노린 공세를 강화하는 데 맞서 ‘그루포 클라린’은 산하 매체를 총동원해 비판 수위를 갈수록 높이는 양상이다.
1945년에 설립된 ‘그루포 클라린’은 신문과 잡지, 공중파TV 채널, 케이블TV 채널, 라디오 방송, 인쇄·출판업체 등을 소유하고 있다. 2011년 기준으로 연간 매출액이 20억 달러에 달할 정도로 자타가 공인하는 아르헨티나 최대의 미디어 그룹이다.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그루포 클라린’ 간의 힘겨루기에 최근 들어 변화가 생겼다. 대법원이 단일 기업이 운영할 수 있는 TV와 라디오 방송사의 수를 축소하는 등의 내용을 담은 개정 미디어법에 대해 10월29일 합헌 판결을 한 것이다. 작년 12월 발효된 이 법은 특정 기업이 같은 지역에서 공중파 TV와 케이블 TV를 겸영하거나 방송시장에서 35% 넘는 점유율을 차지하는 것을 금지했다.
대법원은 “미디어를 통해 유통되는 상품인 사상과 정보에 집중이 일어나면 특정 내용만 대중에게 전달될 것이고, 이는 공적 토론과 여론의 다양성을 심각하게 침해할 수 있다”고 판시했다. 미디어의 독과점 규제라는 명분을 인정한 것이지만, 실제론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그루포 클라린’이 표현의 자유에 대한 모독이라며 국제 제소 의사를 밝히는 등 강하게 반발했으나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방송통신위원회 위원장은 대법원 판결이 나온 지 48시간도 지나지 않아 ‘그루포 클라린’에 보유 주식의 자발적인 처분을 권고했다. 미디어 전문가들은 이를 ‘그루포 클라린’ 해체 작업을 알리는 신호탄으로 해석했다.
‘그루포 클라린’이 처음부터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대립한 것은 아니다. ‘그루포 클라린’은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년 집권)에서 페르난데스 대통령으로 이어지는 부부 대통령과 비교적 원만한 관계를 유지했다. 양측의 관계가 틀어진 것은 2008년 들어서다. 당시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인플레 안정을 위해 농산물에 부과하는 세금 인상을 시도했으나 농민들의 거센 반발로 실패했다. 이 과정에서 ‘그루포 클라린’은 농민들을 지지했고, 이는 페르난데스 대통령과 반목하는 원인이 됐다. 이후 사사건건 정부 정책에 제동을 걸었고,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2009년부터 미디어 법 개정을 추진하면서 본격적인 견제에 나섰다.
‘그루포 클라린’에 대한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압박은 최근의 정치 상황과도 무관하지 않다. 10월27일 총선은 여당의 패배로 끝났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의 국정 장악력 상실은 물론 2015년 대선을 앞둔 여당 전체가 방향성을 잃고 흔들릴 수 있는 상황이었다.
총선 이틀 만에 나온 대법원 판결은 여론의 흐름을 돌려놓았다. 페르난데스 지지자들은 총선 패배를 잊고 대법원 판결에 환호했다. 10월30일은 아르헨티나에서 군사독재가 종식되고 민주주의가 회복된 지 꼭 30년 된 날이었다. 부에노스아이레스 시내에 모인 페르난데스 지지자들은 대법원 판결이 ‘더 많은 민주주의’를 약속한 것이라며 승리를 자축했다.
페르난데스 대통령은 대법원 판결의 여세를 몰아 ‘그루포 클라린’을 더욱 거세게 압박할 것으로 보인다. ‘그루포 클라린’으로서는 마땅한 대응 전략이 눈에 띄지 않는다. 1년 후 치러지는 대선이 여당의 패배로 끝나 반전의 계기가 마련되기를 기대하고 있는지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