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 가르기' 이념 언어, 독자 판단 흐린다
사설·칼럼 등 사회 이념갈등 증폭 우려
"흑백논리 대신 객관적 용어 사용해야"
강진아 기자 saintsei@journalist.or.kr | 입력
2013.12.04 14:03:20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친미와 반미, 종북과 수구….’
언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이념적 언어를 반성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올 한해 국정원 댓글 사건부터 이석기 의원 및 통합진보당 사태, 최근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미사 이후 거센 ‘종북’ 논란까지 거대한 이념의 소용돌이에 직면한 한국사회에서 언론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문제의식에서다. 정치, 사회 지면을 가득 메운 이 같은 단어들에 기자들 스스로가 무뎌지지 않았느냐는 자성이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왔다.
지난 3일 한겨레말글연구소와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주최로 열린 ‘언론언어와 소통, 민주주의’ 주제의 제9차 연구발표회에서 최인호 한겨레 말글연구소 연구위원은 ‘언론 속의 이념언어’ 발표를 통해 “언론이 이념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을 부정할 수 없다”며 “좌-우, 진보-보수, 적-백을 기준으로 자기 성향에 맞지 않는 쪽을 가려내고 적으로 돌리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했다.
언론들은 공평무사와 불편부당을 내세우지만 권력과 광고주, 사주의 간섭과 영향을 크게 받는 현실에서 정파성과 성향을 비껴갈 수 없다는 지적이다. 정치집단 이상으로 이념 성향을 지칭하는 용어들을 남발하며 이념을 재생산하고 유통하고 있다는 것이다.
최 연구위원은 “우리 사회의 정치 또는 이념적 논쟁구조에서 언론이 진보나 보수, 좌와 우, 친일과 반일, 친미와 반미, 반공과 용공, 성장과 분배로 맞세우거나 가르면서 이를 별다른 고려 없이 쓰고 있다”며 “그 결과 이념은 간 데 없고 편 가르기만 남았다”고 비판했다.
이는 취재 현장에서 정치인들의 발언을 그대로 전하면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종합일간지 정치부 한 기자는 “일반 기사에서 정치인들이 사용하는 단어를 인용으로 전달하기 때문에 그것까지 사용하지 말라는 것은 과한 주문 같다”며 “이 같은 단어를 쓰지 않으면 좋겠지만 현실 정치를 반영했을 때 힘들다”고 말했다.
하지만 언론사 논조를 보여주는 사설이나 칼럼 등은 다르다. 회사 입장을 반영하기 때문에 의도적인 측면이 있다는 설명이다. 이 기자는 “언론이 냉정하고 차분하게 정치권 싸움을 말려야 하는데 앞장서서 이념 다툼을 부추길 수 있다”며 “결국 국민들의 판단력을 흐리게 하는 문제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하지만 진지하게 이념 논쟁을 하거나 실천할 기회가 없었던 점에 비춰 이 같은 논리에 둔감해졌다는 우려도 있다.
김준형 한동대 교수는 “한국에서 유독 이념 논쟁이 거센 것은 언어에 숨은 권력이 만든 가짜 이념 논쟁 탓”이라며 “기득권 세력이 자신들의 정당성을 위해 쉽게 이념 딱지를 붙이면서 그 말에 담긴 고유 가치는 사라지고 ‘다름’이 아닌 ‘틀림’이 되고 있다”고 밝혔다.
권력 비판 대신 특정 정당의 당론이나 이해관계 등을 의도적으로 대변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의문도 제기됐다.
한용운 겨레말큰사전편찬위원회 편찬실장은 “마치 ‘정권 획득’이 그 언론사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기사를 쓴 예가 많이 보인다”며 “보수, 진보, 자유, 민주, 통일 등 단어에 이분법적인 이념 의미를 더하고 좌빨, 수구꼴통, 종북 등 자극적인 단어를 생산하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든다”고 밝혔다. 김 교수도 “언론의 왜곡된 이념적 언어 사용은 권력에 의한 배제와 폭력, 억압 차원까지 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야 한다”고 말했다.
때문에 판박이처럼 쏟아내는 단어의 사용을 지양하고 기존 언어를 깨는 실험이 필요하다는 의견이다.
최 연구위원은 “적어도 사건이나 정책을 두고 개념이 모호한 양론이 아니라 사안별로 좀 더 정확하고 객관적인 용어를 전달해야한다”며 “그에 걸맞은 ‘이름짓기’를 해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일례로 경제성장을 주장하는 이는 보수나 우파라는 포괄적 지칭이 아닌 경제성장론자, 분배를 앞세우고 주장하는 쪽은 분배론자, 주체사상을 주장하는 이는 종북주의자가 아닌 주체사상론자, 전시작전권 회수 연기를 주장하면 연장론자나 시기상조론자 등으로 표현하는 것이 사안을 판단하고 이해하는 데 쉬울 수 있다는 제안이다.
실제 올해 상반기 인터넷 독립 언론인 뉴스타파가 보도한 ‘조세피난처 프로젝트’ 보도와 관련해서도 한겨레는 지난 5월 ‘조세회피처’로 바꿔 사용한 바 있다. ‘피난’이라는 단어가 ‘피해 재산을 안전한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본질을 호도할 수 있다는 우려에서였다.
언론의 신뢰도 회복을 위해서도 자성이 필요하다. 한국사회에서는 이념이 얽히면 민감하게 받아들이기 때문에 공공기관 등에서는 이와 관련된 바른 언어 사용을 권장하거나 접근하기는 어렵다는 입장이다.
최 연구위원은 “언어는 당대 사회 수준을 넘어서기 어렵다. 언론이 먼저 사안을 나눠 논평해서는 독자들의 염증을 일으킬 수 있다”며 “사회를 반영하면서도 독자가 온전히 판단할 수 있도록 도와줘야 한다”고 밝혔다.
한 실장도 “사회를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본연의 자세로 언론이 극단적이고 편협한 이분법적 이데올로기를 벗어나 독자들이 사고의 다양성을 가질 수 있도록 기여하기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