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청준과 이승우의 어떤 인연

[스페셜리스트│문학·출판] 어수웅 조선일보 기자·문화부


   
 
  ▲ 어수웅 조선일보 기자  
 
얼마전 이청준(1939~2008)의 5주기를 맞아 전남 장흥 진목마을을 다녀왔다. 장흥은 이청준의 고향이지만, 올해 동인문학상을 받은 작가 이승우(54)의 고향이기도 하다. 평생을 존경한 선배였지만, 말 한마디 제대로 못붙여 봤다는 게 이 소심한 후배의 고백이다.

이승우를 ‘작가’로 이끈 책은 이청준의 단편 ‘나무 위에서 잠자기’. 여성지의 별책부록으로 나온 이 소설을 처음 읽으며 ‘고등학생 이승우’는 어떤 전율을 느꼈다고 했다. “소설 쓰는 재미를 준 작품은 여럿 있었지만, 작가가 되고 싶다는 생각은 처음이었다”는 것이다. 진목 마을에서 그 모델이 됐던 나무를 보고, 마음 한 켠이 뭉클했던 기억이 있다.

한 청년이 소설가가 되고 또 권위있는 문학상을 받기까지, 두 사람의 인연은 공교롭다. 1981년 한국문학 신인상으로 이승우의 ‘에리직톤의 초상’을 뽑았던 심사위원은 이청준. 그는 “데뷔작을 준비할 때 선생의 ‘소문의 벽’을 반복해서 읽었다”면서 “내 초기 단편에는 이청준 스타일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고 했다.

10여년 뒤 1993년, 작가는 ‘생의 이면’으로 제1회 대산문학상을 수상한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상금 5000만원을 내걸고 시작한 화제의 문학상이었다. 다시 한 번 공교롭게도, 이때 최종 후보에 함께 오른 작가는 선배 이청준. 그는 몸둘 바를 몰랐다고 한다. 물론 선배는 이승우에게 축하와 격려를 보낼 뿐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2000년 확대 개편한 동인문학상으로 이어진다. 동인상 개편의 핵심은 수상작을 책으로 펴내던 기존 문학상의 상업주의와 절연하고, 매월 독회를 진행한 뒤 마지막 독회에서 최종 수상작을 선정한다는 것. 이청준은 이 때 시작한 7명의 종신 심사위원 중 한 명이었다.

동향 후배 챙긴다는 말 들을까 저어하는 역차별이었을까. 이청준이 종신 심사위원이 된 이후, 이승우의 작품은 5번 최종 후보에 올랐다가 5번 떨어졌다. 장편 ‘식물들의 사생활’(2001), 소설집 ‘나는 아주 오래 살 것이다’(2002), 소설집 ‘심인광고’(2005), 장편 ‘그곳이 어디든’(2008), 장편 ‘한낮의 시선’(2010). 이번 수상작 ‘지상의 노래’는 6번째 도전이었다.

이승우는 “정말 존경했기에 선생 앞에서는 제대로 말도 하지 못했다”면서 “돌아가셨다는 소리를 들었을때, 잘 안우는 편인데 처음으로 울었다. 고아가 된 느낌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소설가로서, 인간으로서, 내 사표인 분이다”라고 여러 번 반복해서 말했다.

최근 여러 차례에 걸쳐 만나며, 이승우로서는 하기 어려웠을 고백 한 마디를 들었다. 그의 불행한 유년기와 비극적 가족사에 대한 이야기였다.

어떤 장례식이 있었다. 소년 이승우가 초등학교 1학년 때였다. 사람들은 소년을 상주(喪主)라고 불렀다. 그가 든 영정사진의 주인공은 마을에서 정신병으로 격리된 인물이었다. 소년은 사진의 주인공이 아버지라는 사실을 그날 처음 알았다. 가난은 둘째 치고, 이후 이승우의 가족은 뿔뿔이 흩어졌다. 쌍둥이 형은 광주 친척 집으로, 이승우는 장흥 큰아버지 집으로 갔다. 네 살 위 누나는 외갓집에 맡겼다. 어머니와도 모두 헤어져야 했다.

작가는 “나는 중고등학교 시절 친구가 한 명도 없다”고 했다. 그리고 혼자말처럼 속삭였다. “요즘 생각해본다. 그때 나에게 동심이 있었던가.” 이승우는 당시 ‘자폐의 방문’을 열고 나오게 해준 게 문학이라고 했다. 그 문을 열어준게 이청준의 문학이었다는 것이다.

문학이 세상을 구원하지는 못하지만, 때로 한 사람의 영혼에 영향을 미칠 수는 있다. 그리고 때로 그 사람은 다른 여러 사람을 구원하기도 한다. 이청준을, 이승우의 문학을 읽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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