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질 월드컵, 주사위는 던져졌다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2013년 12월6일(브라질 시간), 지구촌 축구팬들의 눈길이 브라질 북동부 바이아 주(州)의 휴양지 코스타 도 사우이페로 쏠렸다. 2014년 브라질 월드컵 본선 조 추첨 현장. 행사는 79개 TV 방송국과 30여 개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전 세계 200여 개국에 생중계됐다.

코스타 도 사우이페는 국제축구연맹(FIFA) 초청 인사 1500명과 세계 각국에서 몰려든 2000여명의 취재진으로 북적거렸다. 조 추첨 행사에 든 비용은 120억원으로 역대 월드컵 가운데 가장 많았다고 한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 조 추첨 행사 비용을 현재 가치로 따지면 64억원 정도라고 하니 2배 가까이 많은 셈이다.

조 추첨이 진행되는 동안 행사장인 9000㎥ 넓이의 아레나 사우이페(Arena Sauipe)에서는 환호와 탄식이 이어졌다. 이른바 ‘죽음의 조’에 속한 국가의 대표단 얼굴은 어두웠고 숨소리는 무거웠다. 반면 해볼만한 팀들과 한 조에 편성된 국가의 대표단은 안도감 속에 표정관리에 바빴다.

한국은 러시아, 알제리, 벨기에와 함께 H조에 편성됐다. “다행히 ‘죽음의 조’를 피했다. 상대국 전력이 대체로 무난하다. 역대 최상의 조에 속했다”는 평가가 따랐다. 압도적으로 우세한 전력을 갖춘 팀이 없어 접전 양상을 보일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H조를 ‘행운의 조’로 보는 것은 우리만이 아니었다. H조에 속한 다른 세 나라 축구 관계자들과 취재진은 하이파이브로 환호했다. 한국에 대해 경계심을 늦추지는 않았으나 그들의 눈에 한국은 쉬운 상대의 하나로 여겨지기 때문일 것이다. 벨기에 감독은 한국의 빠르고 기술적인 축구를 높이 평가하면서도 “한국은 일본보다 한 단계 떨어지는 팀”이라며 자존심을 건드렸다. 러시아 감독도 한국을 상대하기 어려운 팀으로 인정하면서도 “어차피 월드컵에서는 모든 경기가 까다롭다”며 대수롭지 않다는 반응을 보였다. 한국 축구팬들이 ‘1승 제물’로 꼽는 알제리 감독만 “우리는 한국처럼 빠른 팀에 약하다”며 엄살을 피웠다.

2002년 한-일 월드컵에서 4강 신화를 쓰고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 월드컵에서 원정 16강을 달성한 한국이 브라질에서 사상 첫 원정 8강 목표를 이뤄 세계 축구계에 강한 인상을 심어줄 수 있을까?

한국 축구는 이미 희망을 얘기하고 있다. “희망이 현실로 다가올 수 있도록 남은 기간 많은 준비를 하겠다”는 홍명보 대표팀 감독의 다짐에 큰 기대를 걸고 있다. 희망을 말하기 앞서 한국 축구를 냉정하게 평가하고 상대를 면밀하게 분석하는 노력이 필요한 것은 당연하다. 조 추첨 현장에서 만난 홍 감독이 냉정한 승부사의 모습을 보여준 것이야말로 희망이다.

홍 감독은 애초부터 조 추첨에 큰 기대를 하지 않았다고 했다. 월드컵 본선에 올라온 32개국 가운데 어느 하나 만만한 팀이 없다는 뜻이다. ‘죽음의 조’와 ‘행운의 조’를 따지기보다는 우리가 어느 정도 준비돼 있고 상대를 얼마나 알고 경기에 임하느냐가 중요하다고 말했다.

해외 스포츠 도박사들은 한국의 조별 리그 탈락을 점쳤다. 도박사들은 벨기에와 러시아의 조 1~2위 가능성이 유력하다고 예상하면서 한국의 전력을 조 3위로 분석했다.

브라질의 축구 전문가들도 일제히 벨기에와 러시아의 16강 진출 가능성과 함께 한국을 조 3위로 평가했다. 그러나 월드컵 본선 진출 횟수와 상대팀과의 역대 전적, 지역 예선 결과 등을 종합한 브라질 전문가들의 분석은 치밀했다. 전문가들은 H조에 절대적인 강팀이 없다고 평가하면서 벨기에가 ‘경쟁력 있는 팀’ 러시아, ‘월드컵 본선 경험이 풍부한’ 한국과 흥미로운 대결을 벌일 것으로 내다봤다. 그들은 벨기에와 러시아가 2002년 한-일 월드컵을 끝으로 본선 진출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H조의 최대 변수로 꼽았다. 이 정도라면 객관적인 전력에서는 다소 뒤질지 몰라도 벨기에·러시아와 두려움 없이 맞붙어볼 수 있지 않을까?

홍 감독은 남미 팀과 한 조에 포함되지 않은 사실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낯선 환경에 적응해야 한다는 점에서 남미보다는 유럽 팀이 상대하기에 더 낫다는 것이다. 홍 감독의 진단에 전적으로 공감한다.

2014년 월드컵을 1년 앞두고 지난 6월에 열린 2013년 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에서 세계 최강 스페인은 결승전에서 브라질에 3대 0으로 완패했다. 유럽 팀들은 남미에 오면 제 기량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속설을 입증한 것이다.

브라질 대표팀 감독은 조 추첨이 끝나고 나서 남미 팀보다 스페인, 이탈리아, 포르투갈 등 유럽 팀과 경기하는 게 편하다고 말했다. 브라질이 남미에서 최강자인 것은 맞지만, 비슷한 스타일의 축구를 하는 남미 팀들과의 경기에서는 언제나 애를 먹기 때문이다.

축구팬의 입장에서 부담감을 떨쳐내라는 주문을 하고 싶다. 한국갤럽 조사에서 응답자의 81%가 16강 이상 진출을 기대했다. 8강 이상을 내다본 응답자도 26%에 달했다. 홍 감독이나 대표팀 선수들로서는 어깨가 무거워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2014년 월드컵에서 부담감으로 치면 개최국 브라질을 따라갈 나라가 없다. 브라질은 자국에서 열린 1950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우루과이에 2대 1로 패해 우승컵을 내준 쓰라린 경험이 있다. 월드컵 통산 5회 우승에 빛나는 브라질이지만, 자국에서 우승컵을 들어올리지 못했다. 브라질 국민은 2014년 월드컵에서 64년 묵은 한을 씻고 싶어 한다. 2억 국민의 마음은 2014년 월드컵 결승전이 열리는 리우데자네이루 시의 ‘브라질 축구 메카’ 마라카낭 경기장에 이미 가 있다. 브라질 대표팀의 루이스 펠리페 스콜라리 감독과 ‘브라질 축구의 새로운 별’이라는 네이마르를 비롯한 선수들이 느끼는 부담감은 우리에 비할 바 아니다.

한국 대표팀의 경기는 상파울루와 포르토 알레그레, 쿠이아바 등 3개 도시에서 열린다. 이동거리가 비교적 멀지 않고 한인 동포들의 열띤 응원도 힘이 될 것으로 보인다. 한국 대표팀 선수들이 자신감 넘치는 플레이로 골문을 시원스럽게 열어젖히는 장면을 상상해본다.
맨 위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