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모부 숙청한 당(唐) 고종과 김정은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틈틈이 중국의 역사를 들여다보던 중 마침 당 고종(高宗)이 친고모부인 재상 장순우지(長孫無忌)를 제거하는 부분을 보고 있는데 북한에서 김정은이 역시 친고모부인 장성택을 숙청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물론 우연일 뿐 전혀 연관성이 없는 두 사건이지만 개인적으론 북한을 또 하나의 봉건체제로 이해하는 데에는 더 없이 좋은 소재가 됐다.

당나라의 3대 황제인 고종은 원래 황제가 될 가능성이 적은 사람이었다. 그는 저 유명한 당 태종 이세민의 적자로는 셋째, 서자까지 포함하면 아홉째 아들이었다. 그런데 황태자로 책봉된 첫째와 문무에 뛰어나고 권력욕도 대단했던 둘째 사이의 갈등과 모순이 그에게 행운을 가져왔다. 골육상쟁의 위험 상황을 알게 된 당 태종은 번민 끝에 황태자와 둘째를 모두 폐하고 셋째인 당 고종, 이치(李治)를 황태자로 삼았다. 당 태종 역시 현무문의 변(玄武門事變), 다시말해 군사 반란을 통해 당시 황태자였던 형과 동생을 살해한 뒤 황제가 되었고, 이를 평생의 짐으로 생각하고 살아온 터라 대를 이어 터질 듯한 골육상쟁은 도저히 견뎌낼 수가 없었다고 역사가들은 평하고 있다.

그런데 황태자 이치는 글에는 뛰어났으나 심약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들의 권좌를 염려한 당 태종은 죽기 전 자신의 매제인 장순우지를 비롯한 원로대신들에게 황태자를 도와 달라는 유지를 내린다. 이들이 이른바 고명대신(顧命大臣)이다. 그러나 이들의 도움과 지도는 당 고종에겐 황권의 제약요인이기도 했다. 남북조 시대 이후 강해진 귀족의 권위가 이들 고명대신들로 인해 당 고종대에 와서 황권을 능가할 정도가 된 것이다. 조정은 이들 고명대신들의 세상이었다. 그 수장인 장손우지가 반대하면 황제라도 할 수 있는 게 거의 없었다.

이 같은 모순은 새로운 황후를 세우는 과정에서 폭발했다. 역사상 유일한 여황제였던 우저티앤(武側天). 우리에게 측천무후(側天武后)로 알려진 그녀는 당 태종의 후궁으로 들어와 그의 아들인 당 고종의 후궁이 된 뒤 황후에까지 오르는, 그리고 결국 스스로 황제가 돼 당나라의 이름을 주(周)나라로 바꾸기까지 하는 정말 전설같은 인물이다. 아무튼 당 고종은 그녀를 황후로 삼기 위해 귀족들과 대립하면서 황권을 강화해나갔고 결국 이에 반대하는 친고모부이자 귀족의 수장이었던 장순우지를 ‘역모죄’로 얽어매 숙청한다. 외지로 귀양을 간 장순우지는 결국 자살을 택하는데 고명대신의 몰락이자 황권의 승리였다.

북한의 김정은 역시 애초엔 권력 승계 가능성이 다른 형제보다 높아 보이지 않았던 인물이다. 장남 김정남은 일찍부터 기괴한 행동으로 승계자에서 멀어져 보였고, 김정일이 아꼈다던 고영희의 소생 중에서도 김정철이 유력하다는 게 불과 3년전까지의 관측이었다. 그런데 어느날 파격적으로 김정은이 후계자로 지정되고 현대 사회에선 전무후무할 3대 세습이 완성됐다.

그리고 김정은 체제를 이끌어갈 주요 인물로 김정일 장례식에서 운구차를 함께 호위한 리영호 군총참모장, 김영춘 인민무력부장, 그리고 장성택 등 7인이 이른바 운구대신(運柩大臣)으로 불리며 주목을 받았다. 젊고 정치경륜이 짧은 김정은이었기에 이들의 존재는 더욱 주목됐다. 그러나 이들 고명대신들의 권한이 너무 커갔던 것일까? 아니면 ‘곁가지’가 ‘본가지’를 위협하기에 이르렀던 것일까? 김정의 1인 권력 확보를 위한 피의 숙청은 결국 친고모부인 장성택의 숙청, 그리고 총살로 북한 사회를 소용돌이로 몰아갔다. 장성택의 죄목 또한 옛날식으로 하면 역모(逆謀), ‘국가전복음모죄’였다. 이에 덧붙인 전횡과 부정부패 등은 구실에 불과해 보인다.

장성택의 숙청 과정은 북한이 현대사회의 봉건국가임을 새삼 각인시켰다. 또한 1인 권력 유지를 위협하는 개혁, 개방은 더욱 기대하기 어렵게 됐다. 그리고 체제 불안요소가 증가하고 이에 따른 도발의 위험성도 더욱 주시해야 하는 상황도 조성됐다. 김정은의 피묻은 손을 누가 먼저 잡으려 하겠는가?

그러나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그런 ‘봉건 체제’와 교류 협력을 확대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더욱’ 접촉을 강화해야 한다는 점이다. 무엇 때문인가? 바로 ‘한반도의 평화유지’를 위해서다. 도발 가능성이 클수록 이에 대한 대비도 강화해야 하지만 이와 병행한 외교적 수단을 강구해야 하는 게 필수적 사안이다.

1994년의 경험은 지금 매우 시사적이다. 김영삼 대통령과 김일성 주석 간의 남북 정상회담까지 합의된 상황에서 그해 7월 김일성이 갑자기 사망했다. 정상회담을 불과 17일 앞둔 시점이었다. 그런데 우리 정부는 조문을 거부했는데 이는 당시 유행한 ‘북한 붕괴론’에 기댄 것이었다. 이름만 대면 알만한 학자들이 앞다퉈 이르면 3일, 3개월, 1년, 3년 등을 내세우며 북한이 곧 주저앉을 것으로 예측했다. 그러나 그 사이 북한과 미국은 오히려 교섭을 강화해 그해 10월 역사적인 ‘제네바 핵합의’에 이르게 된다. 당시 북미간의 협상 타결 과정에서 우리 정부가 철저히 소외됐다는 점은 그 뒤 두고 두고 반면교사로 거론되곤 했다.

국제정치는 냉정하다 못해 냉혹하다. 장성택의 처형을 비난하는 겉모습만 보면 지금의 미묘한 국제적 흐름을 놓치기 쉽다. 중국과 미국, 일본은 북한의 상황, 의도를 더 정확히 캐내기 위해 그전보다 훨씬 더 발빠른 물밑 행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이런 행보의 중심엔 ‘국가 이익’이 존재한다. 우리는 과연 지금 우리의 최고 국가이익인 ‘평화 유지’를 위해 이런 노력을 하고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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