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미 3국 여성 대통령의 '눈높이 정치'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4.01.29 14:05: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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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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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티나(Argentina)와 브라질(Brazil), 칠레(Chile)를 흔히 ‘남미 ABC’로 부른다. 남미에서 세 나라가 차지하는 비중이 그만큼 크기 때문에 생긴 표현으로 짐작된다. 흥미롭게도 세 나라에서 모두 여성 대통령이 국정을 운영하는 드문 모습을 보게 됐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과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미첼 바첼레트 칠레 대통령 당선자(3월 11일 취임 예정)가 그 주인공들이다.
세 사람에게는 사상 첫 선출직 여성 대통령이라는 수식어가 따른다. 세계 정치의 여풍(女風)을 주도한다는 평가도 받는다. 그러나 현재 세 사람이 처한 상황은 말 그대로 ‘3인 3색’이다.
페르난데스는 남편인 네스토르 키르치네르 전 대통령(2003~2007년)에 이어 집권해 ‘부부 대통령 시대’를 열었다. 2011년 대선에서 승리하며 재선에도 성공했다. 대중적 인기로 무장한 부부는 강력한 국정주도권을 행사했고, 이에 반기를 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러나 요즘 들어 페르난데스의 처지는 말이 아니다. 작년 말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경찰 파업이 전국적으로 발생했고, 치안 공백을 틈타 약탈 행위가 극성을 부렸다. 100년 만에 최악이라는 불볕더위 속에 일어난 대규모 정전 사고는 국민을 분노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페르난데스는 침묵했다. 야권은 대통령이 국정을 포기했다고 비난했다. 페르난데스의 국정운영 평가와 지지율은 곤두박질 쳤다.
아르헨티나는 2001년의 국가부도 사태 재현이 우려되는 위기를 맞았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부부 대통령의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 정책을 원인으로 진단했다. 그러나 아르헨티나의 위기는 포퓰리즘 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그보다는 정부가 국민의 신뢰를 잃었다는 점이 더 커 보인다.
2001년 당시 정부는 금융시장 안정을 내세워 은행예금을 동결했다. 그 때부터 국민은 정부를 믿지 않는다. 돈이 생기면 달러로 바꿔 침대 밑에, 장롱 속에 숨겼다. 정부는 2007년부터 인플레율을 비롯한 경제 수치에도 손을 댔다. 이후 통계 조작 시비가 끊이지 않고 있다.
부부 대통령은 야권을 국정 파트너로 인정하지 않았다. 거대 미디어 그룹의 독과점 체제를 깨뜨려야 한다는 명분을 지나치게 앞세워 언론과 충돌했다. 그렇다고 다른 방법으로 국민과 소통하지도 않았다. 페르난데스의 침묵을 비판하며 최근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올라온 “실종된 대통령을 찾습니다”란 메시지는 부부 대통령에 대해 쌓인 민심을 반영한다.
지난 2011년 집권한 호세프 대통령은 비교적 우호적인 분위기 속에 오는 10월 대선에서 재선 희망을 부풀리고 있다. 브라질 사상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으로 꼽히는 루이스 이나시오 룰라 다 실바 전 대통령의 전폭적인 지원을 업은 호세프는 대선후보 지지율 조사에서 압도적인 우세를 유지하고 있다. 성장둔화와 인플레 상승 압력이 계속되는 상황에서도 그녀의 재선 가능성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경쟁력을 갖춘 야권 후보도 현재로서는 눈에 띄지 않는다.
브라질에서는 작년 6월 국제축구연맹(FIFA) 컨페더레이션스컵 대회를 전후해 대규모 시위가 벌어졌다. 대중교통요금 인상에 항의해 시작된 시위는 정부와 정치권에 만연한 부정부패 척결과 공공 서비스 개선, 복지 확대를 요구하는 목소리로 번졌다.
오는 6월 월드컵 개막을 앞두고 시위 분위기가 다시 가열하자 작년에 정치적 위기를 경험한 호세프는 발 빠르게 움직였다. 월드컵에 반대하는 시민사회단체와 적극적으로 대화하겠다며 소통 의지를 밝혔다. 대통령실의 시민사회 담당 기능 확대도 약속했다.
정권 기반을 강화하는 카드도 꺼내 들었다. 호세프는 대선을 앞둔 개각에서 39개 각료직을 10개 정당에 배분할 것으로 알려졌다. 브라질에서는 군사독재(1964∼1985년)가 끝나고 민주주의가 회복된 이래 연립정권이 전통으로 자리 잡았다. 다당제를 특징으로 하는 브라질 정치 현실 때문이다. 브라질에는 현재 32개 정당이 활동하고 있다.
칠레에서 ‘개혁과 변화의 아이콘’으로 일컬어지는 바첼레트는 숱한 화제와 기록을 만들어가는 정치인이다. 바첼레트는 리카르도 라고스 전 대통령 정부(2000∼2006년)에서 보건장관을 거쳐 국방장관을 지냈다. 남미에서 여성이 국방장관에 기용된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국방장관 재임 당시 대규모 홍수 피해가 발생했을 때 바첼레트가 탱크 위에 올라선 채 이재민 구호작업을 지휘하던 장면은 국민에게 오래도록 깊은 인상을 남겼다.
이는 바첼레트가 남성 우월주의의 전통을 허물고 중도좌파 진영의 후보로 대선을 승리로 이끄는 동력이 됐다. 바첼레트는 2006∼2010년 대통령을 역임하며 민주주의 발전과 안정적인 경제성장을 이뤘다는 평가를 받았다. 2010년 3월 퇴임 당시 지지율은 80%를 훨씬 넘었다.
바첼레트는 작년 대선에서 국민과의 소통에 주력했다. 성장의 혜택에서 소외된 빈곤층과 대화했고, 아우구스토 피노체트 군사독재정권의 잔재인 시장 중심 교육제도의 개혁을 요구하며 2011년부터 시위를 계속해온 학생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바첼레트는 새 정부 출범을 앞두고 ‘화합형 내각’을 구성했다. 23개인 각료직을 4개 중도좌파 정당과 공산당에 배분했다. 공산당 인사가 각료에 기용된 것은 1970년 이후 처음이다. 정책의 균형을 위해 무소속 인사를 6명 기용했다. 여성 각료가 9명인 점도 신선하다는 평가를 받는다.
남미 여성 대통령 3인방의 지난 행적과 현재 상황을 간략하게 짚어봤다. 이들에게서 지극히 평범한 사실을 거듭 확인한다. 성공한 리더십은 소통과 화합을 바탕으로 한 ‘눈높이 정치’에서 나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