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리그와 안네의 일기
[글로벌 리포트 | 일본] 이홍천 게이오대 교수
이홍천 게이오대 교수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4.03.26 14:04:36
|
 |
|
|
|
▲ 이홍천 게이오대 교수 |
|
|
3월23일 사이타마 스타디움 2002. 일본 프로축구 J리그 우라와 레즈의 홈구장. 오후 3시부터 치러진 우라와렛츠와 시미즈 에스펠드의 시합은 J리그 사상 처음으로 관중석을 텅 비운채 치러졌다.
경기장을 가득채워야 할 응원의 함성 대신 상공을 선회하는 취재헬기의 날개 소리와, 텅빈 객석을 취재하려는 기자들의 눈짓만 요란스러운 가운데 시합은 시작됐다. 에스펠드의 응원단은 시합이 열리는 사이타마가 아닌 스즈오카의 홈구장에서 응원의 북을 두드려야 했다. 경기때마다 평균 3만7천명 정도의 관중을 끌어 모았던 우라와 레즈는 이날 무관중 시합으로 인해 7억원 정도의 손실을 고스란히 떠안아야 했다.
이날 시합은 3월8일 사이타마 스타디움에서 열린 경기에서 일부 팬들이 “재패니즈 온리(Japanese Only)”라는 현수막을 홈구장 응원단이 자리잡는 골대 뒤쪽 객석 입구에 개시한 것에 대한 J리그측의 제재조치다. 시합시작 한시간 전부터 시합이 끝날 때까지 우라와는 현수막을 철거하지 않았다. 2010년에도 이와 유사한 건으로 제재를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응원단들이 비슷한 문제를 일으킨 바가 있다며 J리그는 우라와측에 시말서 제출도 동시에 명령했다. 우라와측도 문제를 일으킨 응원단 20명에 대해서 무기한 입장금지 조치를 내리는 한편 다른 응원단에 대해서도 홈구장, 원정 시합을 막론하고 현수막이나 깃발을 내걸지 못하게 했다.
이들이 현수막을 내건 이유가 ‘(최근에) 외국인의 관전이 늘어서 응원을 일사분란하게 할 수 없게 되었다’며, ‘(현수막을 내건)골 뒤쪽 응원석은 우라와 홈구장 응원단의 성역’ 이었다는 것이다. 현수막을 내건 이들은 “(외국인들을) 차별할 의도는 없었다”며 “반성하고 있다”고 사죄했지만 구단측은 중징계를 내렸다.
이에 앞서 지난 14일 도쿄시내의 한 도서관에서 ‘안네의 일기’ 관련 서적 23권을 파손시킨 혐의로 36세의 남성이 체포됐다. 용의자는 도쿄 시내 거주자로 도서를 파손한 것은 인정했지만 ‘안네의 일기가 본인이 작성한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판하고 싶었다’고 범행동기를 밝혔다고 한다. 도쿄시내와 요코하마시의 각종 도서관에서 300여권의 ‘안네의 일기’와 관련 서적이 파손되는 사건은 국제적인 관심을 끌었고, 한국과 중국은 이를 두고 일본의 우경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들 두 가지 뉴스는 한국을 혐오하고 중국을 증오한다는 혐한증중(嫌韓憎中)의 흐름을 반영하고 있는 것처럼 인식되기 십상이다. 아베 수상을 포함한 일부 일본 정치가들의 발언이 이 같은 흐름을 강화시키고 있는 것도 부인할 수 없다. 인터넷이나 수상의 페이스북에는 이보다 더한 주장들로 끓어 넘치고 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하는 듯이 각 서점에서는 이런류의 서적을 전시한 특설코너까지 마련하고 있다.
그런데 이런 움직임들을 일본의 우경화라는 것으로 싸잡아 치부하기는 일본 사회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오히려 사건의 본질보다는 사건이 가지는 상징성이 더 부각되기 때문이다. 안네의 일기는 2차대전 때 나치가 저지른 홀로코스트와 연결되어 있고, 우라와 응원단의 현수막은 ‘White Only’라는 미국에서 벌어진 인종차별이라는 심볼과 연결되어 있다. 이 때문에 일본에 ‘반유대주의’나 ‘인종차별주의’가 증가하고 있다는 분석의 보도가 적지 않다.
1922년 월드 리퍼만은 ‘여론’이라는 저술에서 “우리들은 세상을 보고나서 느끼는 것이 아니라, 먼저 정의를 내린 다음에 본다”면서 스테레오 타입에 의한 획일적인 보도를 비난했다. 현상이 중요한 것은 본질을 반영하기 때문이지만, 한가지 현상이 본질인양 치부되는 것 역시 위험한 일이다. 획일적인 보도와 함께 획일적인 무(無)보도도 심각하기는 마찬가지다.
지난 2주 동안 일본 방송의 관심은 한·미·일 정상회담 성사와 고노담화를 변경하지 않겠다는 아베 수상의 발언에 대한 박 대통령의 반응뿐이다. 언론의 역할은 한 사회의 행복과 발전이라는 나무에 물을 주고 갈라진 틈을 메우는 것이지, 증오와 혐오라는 불씨에 기름을 붓는 것은 아닐 것이다. 국제관계라고 해서 이런 역할이 변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들 두 사건은 양국 언론에 언론의 역할이 무엇인지에 대한 물음을 던져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