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아오포럼과 총리의 위상

[글로벌 리포트 | 중국]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 손관수 KBS 상하이 특파원  
 
매년 4월이면 중국 하이난다오(海南島)의 보아오(博鰲)에선 한바탕 난장 같은 말의 잔치가 벌어진다. 바로 아시아의 다보스포럼으로 불리는 보아오포럼(博鰲亞洲論壇·Boao Forum For Asia)이다. 아시아를 넘어 세계 각국에서 정계, 재계, 학계 거물들이 참석해 아시아의 발전과 미래를 모색하는 토론의 마당이다.

보아오는 하이난다오 중동부 해안의 총하이시(瓊海市)에 속하는 진(鎭)급 행정구역으로 면적이 31㎢, 인구는 다해야 1만명 정도에 불과한 작은 섬이다. 보아오(博鰲)는 ‘물고기가 많고 살진 곳’이라는 뜻풀이에서 볼 수 있듯 원래 고기 잡고 쪽밭을 가꿔 살던 작은 어촌이었으나 2002년 이곳에서 국제포럼이 열리면서부터 국제도시로 거듭났다.

보아오포럼은 지난 1998년 당시 호주, 일본 총리 등의 발의를 이듬해 후진타오 당시 부주석이 후원을 약속하며 시작됐는데, 이후 지난 10여년 중국의 눈부신 부상으로 지금은 자연스럽게 중국의 영향력을 과시하고 확인하는 자리가 됐다. 형식은 비정부, 비영리조직인 포럼이사회가 주관하는 행사지만 사실상 중국 정부가 주도하는 행사라는 게 공지의 사실이다.

금년에도 포럼은 리커창 총리의 등장과 함께 화려한 조명을 받은 뒤 그의 퇴장과 함께 막을 내렸다. 한국의 정홍원 국무총리, 호주의 토니 애벗 총리 등 현직 총리 7명, 부총리급, 전직 총리 등을 포함하면 25명 정도의 국가지도자가 포럼에 참석했다.

그러나 현지에선 2000명이 넘는 인사로 북적이던 이 같은 포럼의 열기도 지난해만은 못했다는 말이 나왔다. 올해는 호텔방이 빈곳이 많았다는 것이다. 새로운 중국의 지도자로 등장한 시진핑 국가주석이 참석한 지난해 포럼엔 대통령 7명, 정상급 총리 3명 등 모두 10명의 국가원수급이 참석했으며 IMF 총재, 빌 게이츠, 조지 소로스 등 내로라하는 재계 거물들도 얼굴을 내밀어 더욱 화려한 무대가 됐다.

이런 사정 때문에 이번 정홍원 총리의 보아오포럼 참석은 여러모로 대접을 받는 자리였다. 경제규모나 협력면에서 볼 때 참가국 중 가장 경쟁력이 있는 나라였으며 최근 한·중 관계의 진전은 정 총리에 대한 중국의 예우를 더욱 각별하게 했다.

주한 중국대사가 서울에서부터 충칭까지 이어진 정 총리 일정을 계속 수행한 것이나, 만찬장에서도 리커창 총리와 30분이 넘는 단독 대화를 나눈 것 등에도 그런 각별함이 묻어 있었다.

충칭에서도 환대는 이어졌다. 중국의 유력한 차세대 지도자로 불리는 쑨정차이(孫政才) 당서기는 말 한마디 한마디에 예우를 다했고, 이미 개발상에게 매각돼 철거를 앞두고 있던 광복군 총사령부 건물의 원형 복원을 적극 검토하겠다고 약속한 것도 그런 차원으로 해석될 수 있다는 게 동행한 외교부 관계자의 전언이었다.

총리실이나 외교부나 모두 중국 측의 예우에 만족감을 표시했고 당사자인 정홍원 총리 역시 기자간담회에서 ‘달라진 한국의 위상을 피부로 느꼈다. 상당히 만족스럽다’고 밝혔다. 외교부 관계자는 달라진 한국의 위상과 대우를 설명하면서 ‘아마 정 총리는 이전 총리들이 그동안 어떤 대접들을 받았는지 잘 모를 것이다’라는 말로 달라진 위상을 강조했다.

대한민국의 총리가 외교무대에서 대접을 받는다는 것은 여러모로 뿌듯한 일이다. 그만큼 대한민국이 성장했고, 그만큼 남을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올라서고 있다는 뜻일테니 말이다.

다만 이번 취재과정에서 불현듯 확인한 국무총리의 ‘실언’은 ‘위상’ 문제와는 별도로 당황스러움과 씁쓸함을 던지는 것이었다.

정홍원 총리는 포럼 기조연설에서 우리의 평화통일 노력을 언급하는 과정에서 “최근 우리나라의 ‘박정희’ 대통령께서는 독일 드레스덴에서 한국의 통일기반을 조성하기 위해…”라며 박근혜 대통령을 박정희 대통령으로 발언했다. 더구나 이를 수정하지 않고 그냥 넘어가 현장의 수행관계자들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이 발언을 방송에서야 쓸 수 없는 게 자명한 일이지만 총리실은 여러 번 이를 부탁하는 당혹스런 상황을 겪어야 했다.

박정희 생가 성역화, 박정희 공원, 박정희시, 박정희 고등학교…. 자발적인 공무원들로부터 선거에 나선 사람들까지 앞다퉈 내놓는 박정희 상품화, 우상화는 모두 박근혜 대통령의 마음을 얻고자 기획된 것들이다.

정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을 보면서 박정희 전 대통령을 느끼는 것일까? 박정희 전 대통령의 역사적 명예회복을 ‘대통령이 된 딸’의 과업으로 여기는 그 딸의 깊은 마음을 평소 너무 헤아리다 일어난 일은 아닐까? 정 총리는 단순한 실수로 생각하겠지만 대한민국 공무원의 수장인 총리의 ‘그 실언’에 씁쓸함을 떨칠 수 없는 게 지금 대한민국의 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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