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업화-민주화-인간화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편집위원회 jak@journalist.or.kr | 입력
2014.05.21 15:16:51
실로 믿기 힘든 일이 벌어지고 있다. 후배 기자들 대다수가 인정할 수 없다며 퇴진을 요구하는데도 ‘과장 왜곡’ ‘파워 게임 양상’ 운운하며 버티기에 들어갔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정치적 목적의 파업 시도와 좌파 노조에 의한 방송 장악을 반드시 막겠다”며 목소리를 높인다. 청와대의 인사개입 의혹에 대해서는 “들은 바 없다”며 철저히 부인으로 일관한다.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공영방송 KBS의 길환영 사장 얘기다.
구성원들이 뭐라 말하든 귀 막고 오로지 절대권력만 바라보는 언론사 사장의 모습, 어디서 많이 본 장면 아닌가. 멀리 갈 것도 없다. 공영방송의 정치적 중립은 내팽개친 채 임기 내내 자기 사람 심기와 정권 비호에 열을 올린 김재철 사장 체제 하에서 지금 MBC가 어떻게 됐는가. 독자와 시청자보다 거대자본의 눈치를 살피고 절대권력의 향배에 촉각을 더 곤두세워오는 동안 국민 신뢰도는 낮아질 대로 낮아진 게 작금의 한국언론 상황 아니던가.
세월호 참사로 온 나라가 비탄에 잠겨 있다. 대한민국의 현실을 압축해놓은 듯한 각종 부조리와 모순이 한꺼번에 터지면서 부끄럽고 미안하다는 국민들의 목소리가 전국을 뒤덮고 있다. 세월호와 함께 침몰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는 대한민국 언론도 예외일 수 없다. 언론인들이 ‘권력 감시 비판’ ‘사회의 목탁’이라는 본연의 역할을 망각한 채 기득권에 편승한 결과 세월호라는 괴물을 키웠기 때문이다.
지금 언론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현상은 암울함 그 자체다. 공영방송 KBS의 사장이 보도국장에게 연락해 정권을 흠집내는 보도 자제를 요구하는 등 사사건건 보도에 개입했다고 한다. 청와대의 뜻이라며 보도국장에게 그만둘 것을 종용했다. 김시곤 전 국장의 이 발언이 사실이라면 이는 수신료로 운영되는 공영방송에서 결코 있어선 안 될, 명백한 불법 행위다.
막판에 자리를 잃을 ‘위험’에 처하자 외압 사실을 폭로한 김 전 국장이나 세월호 참사 유족들의 KBS 항의방문에는 꿈쩍도 않다가 유족들이 영정을 들고 청와대로 향하자 부랴부랴 달려가 머리를 조아린 길 사장이나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보도의 중립을 지키고 기자들이 소신보도를 할 수 있도록 최후의 방패막이가 돼야 할 수뇌부들이 일신의 영달을 위해 KBS의 자존심은 송두리째 내팽개친 꼴이다. 승객들이야 어찌 되든, ‘나부터 살고 보자’고 팬티 차림으로 구명정에 몸을 실은 세월호 선장의 행태와 무엇이 다른가.
김 전 국장의 추가폭로로 드러난 정권의 ‘방송통제’ 실태는 더 심각하다. 청와대 출입기자를 특정인으로 교체해 줄 것을 요구한 적도 있다니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다. 김 전 국장 후임으로 임명됐다 7일 만에 해설위원으로 옮긴 백운기 전 보도국장 또한 청와대의 의중이 작용했다는 의혹을 받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19일 대국민 담화를 통해 눈물을 흘리며 세월호 참사에 대해 사과했지만 KBS 사태에 대해선 입을 다물었다.
수백명의 꽃다운 목숨이 스러져간 세월호 참사 전과 참사 후 대한민국은 분명히 달라져야 한다. 산업화, 민주화를 넘어 이제 대한민국은 인간화의 시대로 가야 한다. 그동안 우리는 속도와 효율, 성공에 집착한 나머지 생명과 정의, 원칙을 무시한 채 사회 곳곳에서 괴물을 키웠다. 언론부터 인간다운 모습을 되찾아야 한다. 언론의 독립보다 정권의 안위를 더 걱정하는 언론계 인사가 승승장구하는 괴물같은 구조를 그대로 둔다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