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전부던 피아노와 이별, 운명처럼 다시 음악이 찾아왔다

[기자 25시](16) 중앙일보 문화부 김호정 기자

대학 2학년 때 음악 아닌 다른 길 걷겠다 결심
지면 한계 뛰어 넘으려 클래식 기사에 멀티미디어 가미
틈틈이 팟캐스트·방송 출연…어려운 클래식 쉽게 들려주기
무한한 문화 스펙트럼 관심…그래도 “제 바탕은 음악”


6살 때부터 대학 졸업연주회까지 장장 18년이었다. 예중, 예고를 거쳐 음대까지, 피아노 없이 산 시간보다 피아노와 함께 한 시간이 더 많았다. 누구나 당연히 음악가의 길을 가리라 생각했지만 대학 2학년 시절, 결심했다. 지금껏 걸어온 길과 가장 반대되는 길을 가겠다고. 한 가지가 아닌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길을 찾았더니 ‘기자’가 되어 있었다. 어느새 10년차가 된 김호정 중앙일보 문화부 기자. 음악과 영원히 ‘안녕’하리라 생각했지만 기자로서의 삶은 ‘음악’과의 새로운 만남이었다. 차가운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던 수능일인 지난 13일, 서울 중구 중앙일보 편집국 9층에서 김 기자를 만났다.


“신문으로는 음악을 들려줄 수가 없어요. 하지만 멀티미디어를 활용했을 때 가장 빛을 발휘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음악이죠.”
종이신문에는 음악의 아름다운 선율을 담을 수 없다. 미술은 작품으로, 무용은 사진으로 그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만 소리는 전할 수 없다. 하지만 온라인은 다르다. 지면의 한계를 뛰어넘어 독자들의 눈과 귀를 동시에 만족시킬 수 있는 다양한 시도를 할 수 있다. 새로운 형식의 기사, 중앙일보 문화부에서 클래식·국악·학술을 담당하는 김호정 기자의 머릿속을 가득 채운 고민이다.


“단순한 공연 정보나 리뷰 기사보다는 색다른 기사를 쓰려고 노력하고 있어요. 이제 사람들은 공연이나 음악회를 가기 위한 정보를 얻으려고 기사를 보지 않아요. 특히 클래식은 소개를 한다 해도 하루, 이틀이면 공연이 끝나죠. 고급 정보와 분석, 주관적인 가치가 들어 있는 새로운 기사를 원하죠.”


문화부에 처음 발을 들였던 7년 전과는 사뭇 달라졌다. 넘쳐 나는 정보들 사이에 일반적인 정보 전달은 더 이상 의미가 없다. 사람들이 어떤 문화 기사를 읽을지 새로운 형식과 내용을 찾는 것이 문화부의 최대 고민거리다. “아직 과도기이지만 온라인에 여러 가지를 실험하고 있다”는 김 기자. 지난달 윤이상의 제자인 작곡가 강석희 전 서울대 교수를 소개하는 기사는 유튜브 검색어 3가지를 키워드로 풀어냈다. 해외에서 더 유명한 ‘sukhi kang(석희 강)’, 오케스트라 작품 ‘catena(카테나)’, ‘88올림픽 폐막식’ 음악감독이다. 단락마다 유튜브 영상을 삽입해 이해를 도왔다. 성악가에게 직접 레슨을 받아본 체험 기사에서는 ‘고음 불가’를 만천하에 공개하기도 했다.


중앙일보가 18일부터 홈페이지에서 ‘문화’ 웹페이지를 개편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블로그처럼 매수 제한을 두지 않고 자유로운 소재로 문화부의 영역을 넓히겠다는 실험이다. “흔히 지휘자를 박자만 휘젓는 사람이라고 생각해요. 하지만 오케스트라 단원을 섭외해 지휘자마다 같은 곡을 어떻게 다르게 지휘하는 지 분석해 설명할 수 있죠. 온라인에는 유튜브 영상과 함께 보여주고 지면에는 텍스트로 간략히 정리하는 거죠. 다양한 시도를 하려면 기자들의 취재방식도 바뀌어야 해요.”

리허설 현장에서 아이디어를
“누가 죽였는지 바른대로 말씀드려.”
“안 돼, 더 이상 물러설 수 없어.”
“사실대로 말하면 돼, 확실한 게 있잖아.”


소프라노의 높은 음색과 바리톤의 묵직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세종문화회관 예술동 3층 나동 종합연습실. 더블베이스와 피아노, 호른, 플루트 등 18명의 오케스트라 연주자, 5명의 성악가가 모여 연습에 한창이다. 20일부터 서울시오페라단이 초연하는 창작 오페라 ‘달이 물로 걸어오듯’ 리허설 중이다. 아내와 함께 아내의 의붓어머니와 여동생을 살해하고 암매장했던 한 남자의 실화를 바탕으로 만든 이야기다.


“56마디부터 57마디까지. 음정 좀 확인하고 갈게요. 한 음 높여주시죠. 잠깐, 샵(sharp) 네 개 붙었어요.” 윤호근 지휘자(프랑크푸르트 오페라극장 지휘자 역임)의 날카로운 지적이 이어졌다.


이번 오페라는 국내 ‘창작물’이라는 데 남다른 의미가 있다는 김 기자. 통상적으로 ‘라 트라비아타’, ‘토스카’, ‘라보엠’ 등 외국 오페라를 그대로 가져오는데 국내에서 새로운 줄거리와 음악을 선보였다는 것. 김 기자도 그 의미를 살릴 기사를 궁리하며 13일 리허설 현장을 찾았다. “현장을 보면 좋은 기사가 나와요. 공연이 어떻게 만들어지는 지 알 수 있죠. 그래서 리허설을 최대한 많이 보려고 해요. 관객들도 공연 전 ‘날 것’의 상태를 궁금해 하죠.”


연습에 방해될까 까치발을 하고 다가가 노래와 연주에 귀를 쫑긋 세웠다. 오페라단 관계자에 리허설 장면을 담은 사진을 부탁하고 각 구도별 모습도 체크했다. 기사에 필요한 사진을 미리 준비해놓는 것.


“아까 노래 가사 잘 들리지 않았어요?” 세종문화회관을 나서며 리허설 관람 소감을 묻자 어느새 ‘아이디어’를 얻었다는 김 기자. “원래 오페라가 이태리 말에 맞는 발성이기 때문에 한국말로 하면 어색하고 발음이 잘 들리지 않아요. 한국말은 장단음, 모음 구조가 다르고 음길이에 따라 섬세하게 발음해야 하죠. 그런데 아까 한국말 가사가 잘 들리더라고요. 작곡가와 지휘자가 신경을 쓴 것 같아요. 오페라 대중화에 매우 중요한 요소죠.” 리허설 스케치로 기사를 시작해 생생함을 살리고 이번 오페라만의 차이점을 강조하겠다는 구상이다.

빠듯한 취재일정 ‘일상으로의 초대’
이날 오전에는 크로스오버 가수 ‘카이’ 인터뷰와 서울시의회 서울시교향악단 행정사무감사를 취재했다. 10시3분. 차가 막혀 늦어지는 취재원과 약속장소를 시의회 앞으로 옮겼다. 11시 행정사무감사까지 빠듯하다. 근처 찻집으로 보이는 곳에 들어갔지만 식사만 판단다. 부족한 시간에 이동하기가 곤란한 상황. “20분만 쓸게요. 인터뷰 때문에…” 김 기자가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잡았다.


지난달 ‘Kai in Italy’ 음반을 발매한 카이. 팝페라뿐만 아니라 여러 음악을 혼합한 크로스오버 가수다. 데뷔 당시에도 김 기자가 인터뷰를 하며 남다른 인연이 있다. 김 기자는 “클래식을 쭉 하다가 문제의식을 느끼고 여러 가지 시도를 많이 하고 있는 가수”라며 “음대를 나와 굴레를 벗어나서 도전하고 있다. 그래서 소개해주고 싶었다”고 설명했다.


“지난번과 달라진 점은 뭐에요?”(김 기자)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어요. 1집, 2집 앨범 순서를 세면서 규정하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때마다 흥미로운 음악을 하는 거죠. 분야가 한정되지 않은 점이 저란 가수의 장점이자 단점이죠.”(카이)


인터뷰를 마친 후 서둘러 서울시의회 별관으로 발걸음을 재촉했다. 2014년 서울시립교향악단 행정사무감사에 정명훈 예술감독이 출석한다는 이야기가 있어서다. 하지만 이날 해외 공연 일정으로 정 감독은 출석하지 않았다. 대신 서울시향 박현정 대표가 참석했다.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들어보자”며 김 기자가 회의실에 들어갔다.


도마 위에 오른 것은 서울시향의 지휘를 맡고 있는 정 감독의 피아노 독주회였다. 질의답변 시간, 서울시의회 문화체육관광위원회 위원들의 질책이 쏟아졌다.
“언론 보도 봤어요? 정 감독이 12월 빈 국립오페라단 지휘하고, 전국 순회 피아노 독주회 한다는 것 알고 있었어요? 시향 감독이 이런 영리 활동을 한다는 게 말이 됩니까?”(김기만 서울시의원)
“……” 침묵이 이어졌다. 한참 후 박 대표가 입을 열었다. “기사 스크랩 보고 알았습니다.”
“감독 급여 2억7000만원, 한번 지휘할 때 4900만원이에요. 감독이 펀딩을 하는데 대표는 수수방관하는 게 말이 됩니까? 조치한 거 있어요?”(김기만 의원)
“…못했습니다. 특수 업계라서 어떻게 조화를 이뤄야할지 모르겠습니다.”(박 대표)


시의회를 나온 후 김 기자가 배영대 문화부장에 전화를 걸었다. 취재후기 형태의 ‘현장에서’를 쓰겠다고 보고했다. “시향 지휘자로 책임을 다하지 않고 사적 이익을 취했다는 건데 시의원 입장에서는 예산 문제를 제기할 수 있죠. 그런데 토론이 일어날만한데 대표가 제대로 답변을 안 했다는 거예요. 사실 세계적으로 여러 오케스트라 지휘를 맡거나 지휘자가 피아노 연주를 병행하는 사례는 많아요.”


편집국에 복귀해 기사 작성에 돌입했다. 시의원 조직도를 펼치고 감사에서 나왔던 언론 보도를 창에 띄웠다. “네, 부장. 예술단체에서 충분히 답해야 하는 문제 아닌가 싶어요.” 몇 차례 말을 주고받더니 오피니언면 ‘취재일기’로 조정됐다. 30여분 뒤 박정호 문화스포츠부문 에디터와도 조율을 거쳐 과거 정 감독의 연봉 논란 사례도 한줄 추가했다. ‘아무리 어려워도 서로 질문하고 대답하며 푸는 게 길’이라는 기사는 ‘정명훈 피아노 독주회가 문제일까’ 제목으로 완성됐다. 북섹션에 들어갈 ‘G2 전쟁’ 신간 리뷰도 마무리했다.


“한쪽이 꼭 옳고, 옳지 않다고 나누기보다는 잘 절충해야죠. 너무 한쪽으로 몰아가기보다 있는 그대로 사실을 보여주면서 약간의 판단을 주는 거죠. 그래서 스트레이트 기사보다 주관적인 취재후기가 더 어려운 것 같아요.”

피아노 소녀, 기자가 되다
6살 때부터 2005년 대학 졸업연주회까지 18년 동안 피아노는 뗄 수 없는 그의 삶이었다. 예원학교, 서울예고, 서울대 기악과로 줄곧 피아노를 전공했던 그에게 기자는 일종의 ‘일탈’이었다. “처음에는 막연하게 시작했죠. 대학에 갔는데 음대가 사회 이슈와 동떨어진 특수집단처럼 여겨져 충격을 받았어요. 가장 반대되는 일이 뭘까 생각했죠. 피아노 한 가지를 너무 오랫동안 해서 다양한 일을 할 수 있는 일을 찾았고, ‘기자’를 택했죠.” 대학 2학년, 언론정보학을 복수전공하고 교지에서 활동하며 그는 세계를 넓혀갔다.


“결정적으로 피아노를 잘 못쳤다”며 웃는 김 기자. 음악은 너무 좋아하지만 무대에 올라가 주목받는 것은 죽기보다 싫었단다. 하지만 한번 시작하면 끝을 보는 타입. “재주는 없지만 엉덩이가 항상 무거웠어요.(웃음) 뭐든 열심히는 하는데 발휘가 안 됐죠. 음악은 시간예술이고, 한번 못하면 변명조차 할 수 없었죠. 글쓰기나 공부는 공평해 보였어요.”


기자를 지원했을 때만 해도 음악과 영원히 이별일 줄 알았다. 새로운 길을 가겠다는 생각에 처음부터 사회부를 지망했다. 입사 후 사회부 2년을 거치고 3년차였던 2007년, 문화부로 발령이 났다. 음악이 다시 그를 찾았다. “2012년 산업부에 옮기기 전까지 클래식을 담당했죠. 기자가 되고나서 음악 전공이 큰 이점이라는 걸 알았어요. 새로운 시도를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들었죠.” 음악계 인맥도 무시할 수 없는 강점이다. 김 기자는 지난해 육아휴직 후 지난 7월 문화부에 다시 복귀했다. 


클래식은 ‘어렵다’는 인식이 많다. 하지만 동시에 그것이 ‘매력’이다. “어려운 것을 알고 나면 더 즐겁지 않아요? 쉬운 것보다 어려운 것을 돌파했을 때 더 재밌잖아요.” 음악회에 가고, 클래식 음악 관계자들을 만나고, 해외 논문과 원서를 찾아 읽는 것도 전문성을 키우기 위한 노력이다. 다양한 활동도 하고 있다. 2010~2011년 진행했던 팟캐스트 ‘김호정의 고전적 하루’를 재개했고, 주말에는 SBS 라디오 클래식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있다. “클래식이 대중적인 시장은 아니잖아요. 사람들의 관심을 넓힐 필요가 있는 한편 고급문화로서의 특성을 살리는 기사가 필요해요. 그 균형을 맞추는 것이 어렵죠.”


앞으로도 문화부에서 다양한 기사로 독자들을 만나고 싶다는 김 기자. 그의 기사가 누군가의 이야깃거리가 된다는 사실은 즐겁다. 궁극적인 업은 문화에 대한 글을 쓰는 것. 주 종목인 클래식은 물론 문학, 공연, 출판, 대중문화, 미술, 종교, 건축 등 문화의 세계는 넓다. “제 바탕은 음악이에요. 항상 더하면 할수록 해야 할 것이 더 많죠. 늘 새로운 가능성이 보여요. 급변하는 미디어 환경에서 지금은 새로운 시도를 할 중요한 시기죠. 어떤 형식의 문화기사를 원하는지 독자들의 요구를 찾아야죠. 앞으로 실험하고 개척할 것들이 너무 많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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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호정 기자가 추천하는 이 겨울의 클래식 두 편


찬바람이 불어오는 겨울, 기자들에게 추천해줄 음악을 부탁했다. 음악은 사람마다 취향이 달라 딱 꼬집을 순 없지만 김 기자가 즐겨듣던 곡이란다. 좋아하는 작곡가를 묻는 질문에는 특별히 선호하는 이는 없지만 흥미롭게 생애를 추적해본 작곡가로 ‘슈만’을 꼽았다.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삶”이라며 “지적인 만족감을 주는 작곡가”라고 했다. 음악이 최고조로 아름다워진 낭만주의 시대, 감성을 자극하는 슈만의 곡에는 아이러니한 수수께끼가 있다. “학자들이 연구하지 않았으면 몰랐을 것들이죠. 새로운 실험을 하면서도 시대를 거스르는 분열적인 사람이었죠.” 김 기자의 컴퓨터 옆 ‘슈만, 내면의 풍경’ 책에 시선이 꽂혔다.


<슈만의 ‘유모레스크’>
‘humoresque’라는 그 이름처럼 위트 있는 곡이다. 하지만 슈만은 이 곡을 자신이 만든 가장 우울한 곡이라고 말했다. “곡에 위트가 있어 들으면 기분이 좋아요. 슈만이 인생 굴곡이 많았는데 그것을 달관하는 음들이 있죠.”


<바흐의 ‘평균율 클라비어 곡집’>
기사 마감에 이보다 어울리는 곡은 없다. ‘푸가’ 기법으로 하나의 선율을 변형해 거울처럼 규율적인 모방과 반복을 보여주는 이른바 ‘돌림노래’ 형태다. “‘수학’적으로 쓰여 듣다보면 머릿속이 정리되는 기분이에요. 곡의 아귀가 꼭 맞아 떨어지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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