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 말기에 황제와 조정을 농락한 환관 10여 명을 말하는 십상시. 삼국지에 자세히 나와 있는 것처럼 십상시의 국정 농단은 결국 대제국의 멸망을 초래했다. 2000년도 훨씬 더 지난 오래전 역사 속에 묻혔던 그 단어가 세밑 정국의 중심으로 부활했다.
세계일보가 ‘십상시로 불리는 박근혜 대통령 핵심 보좌진 10여명과 정윤회씨가 국정을 농단한다’는 청와대 내부 문건을 폭로한 뒤 모든 언론이 후속보도에 동참하고 있다. 조응천 전 공직기강비서관의 조선일보 인터뷰, 박 대통령이 문체부 국·과장 인사에 개입했다는 한겨레의 보도 등을 통해 문건 내용이 조금씩 사실로 드러나고 있다. 조 전 비서관은 “문건 내용이 맞을 가능성이 6할 이상이며 김기춘 비서실장에게 보고까지 했다”고 밝혔다.
특히 정윤회씨는 승마 선수인 딸의 전국대회 및 국가대표 선발전 등을 둘러싸고 특혜 시비 등이 일자 청와대와 문체부 등을 통해 승마협회에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의혹이 제기됐다. 이 과정에서 박 대통령이 직접 문체부 장관을 불러 “나쁜 사람이라더라”며 문체부 국·과장의 경질을 지시했다고 한다. 이 같은 보도는 유진룡 전 문체부 장관의 입을 통해 확인된 내용이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정윤회씨는 십상시가 아니라 상왕 수준이다. ‘나쁜사람’이라고 한마디 하면 대통령이 장관을 불러 그대로 전하게 만드는 권력, 실세 홍보수석과 실세 비서실장의 교체를 서슴없이 추진할 정도의 권력이라면 권력 실세가 아니라 바로 최고 권력이다.
정윤회씨는 지난 1일 중앙일보와 인터뷰에서 “대통령께 누(累)가 되지 않기 위해 일부러 ‘토사구팽’의 사냥개가 됐다. 그런데 이제는 진돗개가 되겠다”고 밝혔다. 엿새 뒤 박 대통령은 새누리당 지도부와 오찬 회동에서 “실세는 청와대 진돗개”라고 말했다. 진돗개에 대한 은유적 표현이 우연히 일치했다고 보기에는 너무나도 놀라울 정도이다.
정윤회가 누구인가? 누가 그를 실세로 임명했고, 그 행동의 책임은 누가 묻는가? 언론이라면 당연히 이러한 질문을 던져야 하고 청와대는 답을 해야 한다. 대통령 측근 중에 부적절한 행동이나 불법행위를 한 인사가 있다면 대통령이 직접 사과하고, 법에 따른 조치를 하면 된다.
하지만 청와대는 정반대의 길을 선택했다. 쏟아지는 엄청난 의혹과 증언을 언론 탓으로 돌렸다. 대통령이 직접 나서 ‘제대로 확인도 하지 않은 한 언론’으로 세계일보를 겨냥했다. 세계일보 사옥엔 ‘언론자유를 위해 싸우겠다’는 비장한 현수막까지 걸렸다. 정윤회씨와 청와대 비서관들의 의혹이 제기됐으면, 그들의 집과 사무실을 압수수색해야지 왜 언론사를 수사한단 말인가.
검찰을 동원해 건전한 언론을 위협하고, 친정부 방송들을 통해 적당히 물타기하려는 전략인 것 같다. 그렇다면 상황을 완전히 오판하는 것이다. 세계일보에 대한 압수수색을 단행하면 대한민국 모든 기자들이 분연히 떨쳐 일어날 것이다. 국정농단 사건에 대한 보도에 보수, 진보를 막론하고 대부분의 언론이 동참하고 있다. 국정농단에 대한 분노는 ‘더 이상 대한민국을 부끄럽지 않게 해야 한다’는 국민적 자존심의 문제이다.
문제가 된 대통령 측근들은 지금이라도 권력을 내놓고 청와대를 떠나는 것이 대통령을 위하는 길이다. 집권 3년도 안된 대통령의 급격한 레임덕은 대통령 본인은 물론 국가를 위해서도 결코 바람직하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