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과 쿠바의 외교관계 정상화 선언은 중남미 지역 전체로 봐도 신선한 충격이다. 세계 경제 위기의 여파로 마땅히 축하할 일을 찾지 못한 채 연말을 맞던 중남미 정상들은 뜻밖의 소식에 환영사를 연발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의 국교 정상화 선언이 나오던 날, 아르헨티나에서 열린 남미공동시장(메르코수르) 정상회의 분위기도 다르지 않았다. 당시 회의에 참석한 브라질·아르헨티나·파라과이·우루과이·베네수엘라·볼리비아 정상들은 오바마 대통령의 결정을 ‘용기 있는 행동’으로 치켜세웠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데 비유하기도 했다. “라틴 아메리카를 위한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반응도 나왔다.
관심의 초점은 미국과 중남미 좌파정권의 관계로 옮겨가고 있다. 브라질을 비롯한 중남미 지역 언론은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 선언이라는 ‘역사적인 화해’가 미국과 중남미 좌파정권 간의 관계 개선에도 동력으로 작용할 것으로 보고 있다.
익명을 요구한 미국 정부 고위 관리는 브라질 유력 일간지와 인터뷰에서 미국이 쿠바에 이어 중남미 지역 다른 국가들과의 관계 개선에도 적극적으로 나설 것이며, 이 과정에서 브라질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중남미 좌파정권의 관계 개선과 관련해 새해 굵직한 이벤트가 기다리고 있다. 1월1일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 취임식과 4월 말 파나마에서 열리는 미주기구(OAS) 정상회의다.
호세프 대통령 취임식에는 미국 정부에서 조 바이든 부통령과 백악관 및 국무부 고위 인사들로 이루어진 대표단이 참석한다. 미국 정부 최고위급 인사가 브라질 대통령 취임식에 참석하는 것은 1990년 이후 처음이다. 지난 2010년 1월1일 호세프 대통령의 첫 번째 취임식 때는 힐러리 클린턴 당시 국무장관이 참석했다.
바이든 부통령의 호세프 대통령 취임식 참석은 미국-브라질 관계 개선을 알리는 신호탄이 될 것으로 관측된다. 양국은 미국 국가안보국(NSA)의 도·감청 문제로 갈등을 계속했다. NSA는 호세프 대통령의 이메일과 전화통화 기록을 훔쳐보거나 엿들었고, 브라질 국영에너지회사 페트로브라스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감시해온 것으로 드러났다. 호세프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충분한 해명을 하지 않자 작년 10월23일로 예정됐던 미국 방문 계획을 전격 취소해버렸다.
그러나 바이든 부통령의 취임식 참석으로 양국 관계가 급진전할 가능성이 있다는 전망이 나오고 있다. 호세프 대통령의 미국 방문이 다시 추진될 것이라는 얘기도 나온다.
쿠바가 OAS 정상회의에 참석하면 미국-중남미 관계는 새로운 단계로 접어들게 된다. 쿠바는 미국의 금수조치가 시작된 1962년 OAS 회원국 자격을 박탈당했다. 2009년에 회원국 자격을 회복했지만 미국의 거부로 정상회의에는 참석하지 못했다.
중남미 국가들은 OAS 정상회의에 쿠바를 초청해야 한다고 한목소리를 내왔다. 특히 좌파 정상들은 쿠바가 제외되면 OAS 정상회의를 거부하겠다는 뜻을 밝히기도 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카스트로 의장이 악수를 나누는 장면에 중남미 좌파정상들이 보일 반응이 미리 궁금해진다.
한편,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와 관련해 베네수엘라의 움직임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베네수엘라와 미국은 2010년 이후 서로 대사를 두고 있지 않다. 양국 관계는 중남미의 반미(反美) 노선을 이끌었던 우고 차베스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 때부터 악화했고, 차베스의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현 대통령에 와서도 팽팽한 긴장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미국 정부가 인권문제를 들어 베네수엘라에 대한 제재를 추진하자 강하게 반발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난 가중과 사회적 소요 가능성 때문에 위기에 처한 마두로 대통령이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에 자극을 받아 어떤 방식으로든 미국과의 관계 개선을 꾀할 것이라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한 국제문제 전문가는 미국-쿠바 국교 정상화 선언이 나온 이후 “쿠바수엘라(Cubazuela)가 끝나간다”고 표현했다. 차베스 시절부터 유지해온 쿠바와 베네수엘라의 끈끈한 반미 동맹 전선이 더는 작동하기 어려워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미국과 중남미 좌파정권의 관계 개선 가능성에 무게를 두는 말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