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권의 책으로 삶을 바꾼다는 게 가능할까. 여러 해 동안 같은 주제로 질문을 던져보고 있다. 책의 효용과 의미에 대해 유보적이거나 회의적으로 변해가는 세상, 확신에 찬 대답을 듣기는 당연히 쉽지 않다. 그러던 중 최근 가장 신념 가득한 어조로 대답한 사람이 있었다. 번역가이자 소설가인 김석희(63)씨다.
그는 인도의 간디 예를 들었다. 1904년 간디는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더반으로 가는 열차를 탔다. 영국에서 변호사 자격증을 딴 인도 지식인이 영국 식민지인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변호사 생활을 막 시작한 참이었다. 그 때 열차에서 읽었던 책이 존 러스킨(Ruskin·1819~1900)의 ‘나중에 온 이사람에게도’. 러스킨은 이 책에서 “사람이 추구해야 할 것은 더 많은 부(富)가 아니라 더 소박한 즐거움이고, 더 큰 행운이 아니라 더 깊은 행복이며, 노동하는 삶이야말로 가치 있는 삶”이라 주장했다. 이 책과 처음 만난 감회를 간디는 자신의 자서전에서 이렇게 적었다.
“한 번 읽기 시작하자 놓을 수가 없었다. 요하네스버그에서 더반까지는 스물네 시간의 여행이다. 열차는 밤에 도착했다. 나는 그날 밤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나는 내 생활을 그 책의 이상에 따라 바꾸기로 마음먹었다.”
이 교훈을 실천에 옮기기 위해 간디는 더반 교외에 땅을 사서 ‘피닉스 정착촌’을 세웠다. 이곳에서는 인종이나 종교에 관계없이 누구나 한데 어울려 소박한 삶을 누릴 수 있었다. 유일한 조건은 규율을 지키는 것이었다. 정직과 금욕, 비폭력, 식기와 옷을 제외한 개인의 소유물을 모두 포기하는 것. 정착촌 거주자는 모두 육체노동에 참여했다. 간디의 실험은 이렇게 시작되었고, ‘마하트마(위대한 성자)’라는 경칭이 따라온 것도 이 때 부터였다.
효용과 실용 차원의 알리바이를 위해 작가 한 명을 더 호명하자. 아르헨티나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루이스 보르헤스(Borges·1899~1986)다. 그는 “책은 인간이 사용하는 여러가지 도구들 가운데 가장 놀라운 발명품”이라고 했다. 다른 것들은 신체의 확장에 불과할 뿐이다. 현미경이나 망원경은 시각의 확장이고, 전화는 음성의 확장이며, 칼과 쟁기는 팔의 확장이다. 그러나 책은 다르다. 책은 기억의 확장이며 상상의 확장이라는 것. 기억이나 상상은 뜬구름과 같아서 깨닫거나 터득하여 용처를 찾아내기 전에는 쓸모없다. 그러나 기억이 없다면 과거를 어떻게 붙잡을 수 있으며, 상상이 없다면 미래를 어떻게 내다볼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책은 기억과 상상을 통하여 과거와 미래로 건너가는 징검다리와 같다. 과거를 돌아보며 반성하고 미래를 내다보며 꿈꾸는 것. 그것이야말로 우리가 인간이기 때문에 누릴 수 있는 가장 큰 축복이니, 책을 읽는다는 것은 그 위대한 축복의 유산을 나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실 즉자적 효용이나 실용이라는 잣대를 들이대면 책만큼 무력한 존재도 없기 마련이다. 책 하나로 세상이 바뀔리도 없고,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드는 데는 화장실 휴지나 이쑤시개 하나가 더 큰 역할을 한다는 냉소까지 있는 실정이다.
이런 냉소를 들을 때 종종 사용하는 인용이 있다. 소설가 이응준(45)의 말인데, “책이 세상을 바꿀 수는 없다. 하지만 책이 한 사람의 마음을 움직였다면, 그건 그의 우주를 변화시킨 것이나 마찬가지다. 감히 세상을 바꾼 것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2015년이다. 책, 아니 활자 산업에 종사하는 우리 모두를 위한 응원이라 생각해 주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