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과 언론부터 바뀌어야 산다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성완종 스캔들로 모든 경제 이슈들이 실종됐다.”
경제5단체의 한 상근부회장이 최근 기자와 만나 탄식하며 한 말이다. 노동시장 개혁, 공무원 연금개혁, 복지와 증세 논란, 최저임금 인상, 일자리 창출, 저물가와 저성장이 병행하는 디플레이션 등 당면한 경제사회 현안들은 일일이 열거하기도 힘들 정도다. 많은 경제인들은 개혁을 위한 ‘골든타임’을 또 다시 허송세월하게 됐다고 허탈해한다. 


그럼에도 내일 세상이 무너지는 게 아니라면 다시 힘을 내야 한다. 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사회적 대타협밖에 없다는 데 대다수 국민들이 동의한다. 하지만 최근 노동시장 개혁을 논의하던 노사정위원회가 결렬된 것처럼 그 길은 멀기만 하다. 이유는 무엇일까? 


한국과 대비되는 것이 유럽의 강소국 네덜란드다. 네덜란드는 1980년대 초만 해도 2년 연속 마이너스 성장, 10%를 넘는 높은 실업률, 재정적자 확대 등 경제위기에 시달렸다. 이른바 ‘네덜란드의 병’은 지속가능하지 않은 복지체계의 대명사로 불렸다. 하지만 1990년 이후 20여년간 연평균 성장률 2.9%로 유럽연합의 평균 이상으로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다. 


네덜란드의 사회학자인 옐러 피서르와 안톤 헤이머레이크는 공저인 ‘네덜란드의 기적’에서 그 결정적 계기를 전 세계 노사관계에서 기념비적 대타협으로 평가받는 1982년의 바세나르협약에서 찾는다. 노동계는 과도한 임금인상 억제라는 양보를 하고, 정부와 경영계는 일자리 나누기 차원의 근로시간 단축, 파트타임 근로 활성화 등을 통해 일자리를 늘리는 것으로 화답했다. 또 1993년에는 신노선협약, 1996년에는 노동유연성협약 등 일련의 대타협을 이어갔다.


우리나라는 위기의 구체적 현상에는 차이가 있지만 저임금·일자리 부족→저소비→저성장→저임금·일자리 부족의 악순환이 해결되지 않으면 희망이 없는 위기의 심각성에는 차이가 없다. 극심한 노동시장 격차, 연공급 중심의 임금체계 등 지속가능하지 않은 노동시장을 바꾸기 위한 대타협이 절실하다. 


네덜란드 기적의 원동력은 서로 다른 의견을 지닌 집단들이 평화로운 합의를 이끌어낸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엘지경제연구원은 이를 ‘네덜란드의 컨센서스 경제’로 표현하며, 그 성공요인으로 노사정의 긴밀한 협조와 동등한 파트너십, 정부의 합리적 리더십, 노사정이 협력·협의할 수 있는 사회적 플랫폼(토대)을 꼽았다.


우리는 이들 성공요인 중에서 어느 것 하나 제대로 갖춘 게 없는 듯하다. 무엇보다 부족한 것은 네덜란드의 정부, 노동재단(노사협의기구), 사회경제평의회(노사정 3자협의체 자문기구)처럼 대타협의 사회적 플랫폼이다. 수년 전 네덜란드 현지취재 중에 만난 노동재단의 사무총장이 대타협의 중심이 되고 있다고 자랑스레 말하던 게 기억난다. 


결국 한국에서 사회적 대타협이 안되는 것은 특정 정책의 문제가 아니라 합의를 도출할 수 있는 과정과 조건이 부족하기 때문이다. 정부·정당·단체·연구기관·언론 등이 모두 지역·진영·당파논리에 빠져 양보와 합의를 거부하는 현실에서 대타협을 바라는 것은 우물에 가 숭늉 찾는 것과 같다. 


아직도 기회는 있다. 그것을 위해서는 먼저 정부와 언론부터 바뀌어야 한다. 대통령은 후임 총리를 사회적 대타협을 이끌 적임자로 지명해야 한다. 언론도 사회적 갈등을 부추기는 무책임에서 벗어나, 대타협을 위한 플랫폼으로 거듭나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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