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리스트' 총리 사퇴로 끝나선 안된다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직장인 단골 점심 메뉴인 김치찌개와 야근할 때 한잔씩 마시는 비타500. 큰 부담 없이 먹고 마실 수 있는 서민의 식사이고 음료이다. 하지만 정치권에선 평범한 음식도 해괴한 모습으로 둔갑한다. 


“기자가 지가 죽는 것도 몰라. 어떻게 죽는 지도 몰라.” 조폭들이나 할 법한 말을 국무총리 후보지명자가 기자들을 불러놓고 했다. “청문회에서 흠이 나와도 김치찌개 먹고 도와달라”며 ‘확인사살’도 잊지 않았다. 김치찌개로 기자를 협박한 정치인이었던 이완구 국무총리는 20일 자진사퇴 의사를 밝혔다. 비타500 박스에 든 3000만원을 받은 의혹에다 계속되는 말 바꾸기로 여론의 뭇매를 맞고 취임 63일 만에 낙마한 것이다. 


‘김치찌개 협박’과 ‘비타500 뇌물’은 완전히 다른 사건이지만 언론의 흐름은 매우 유사하다.
일부 언론은 총리후보자가 스스로 방송을 좌지우지했다는 폭로 내용보다 그 녹취록의 유출경위에 주목했다. 야당 의원의 녹취록 입수 과정과 KBS의 보도 과정에 대한 논란이 계속됐고, 발언 내용을 녹음한 언론사는 사과기사를 내기도 했다. 방송장악을 실토한 총리후보자는 별 탈 없이 후보자 꼬리를 떼어냈고, 야당 원내대표는 그 후보자를 제대로 도와주지 못해 미안하다며 눈시울을 붉혔다.


비타500으로 대표되는 ‘성완종 리스트’ 사건은 권력 핵심부가 총망라된 중대범죄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녹음 파일 유출 경위와 취재 윤리 문제가 부각됐고, JTBC 손석희 사장은 사과로 추정되는 애매한 멘트를 했다. 


일부 언론은 특유의 “알려졌다” 기사를 통해 야당을 끌어들이는 ‘물타기’에 나섰다. ‘검찰 관계자’로 시작해 ‘야당 의원 X’ ‘유력 정치인’ 등 실명은 없으며 “알려졌다”와 “전해졌다”로 마무리하는 무책임한 기사가 남발된다. 기사라면 최소한 누가 이렇게 알렸는지는 밝혀야 하지 않는가. 야당은 발끈하며 해당 언론과 공방을 벌이고, 그러다 보면 초대형 권력비리는 무엇이 문제인지 알 수 없게 된다. 


지난 4월16일 하늘은 온통 흙빛이었다. 극심한 황사가 한반도를 감쌌다. 먼지를 가득 먹은 누런 비가 쏟아졌다. 1년 전 그날 세월호의 학생들은 깨어지지 않는 유리창 너머 자기 생애 마지막 하늘을 바라봤을 것이다. 하늘도 그 마지막 눈빛을 잊을 수 없기에 스스로 얼굴을 가리고 눈물을 흘렸을지 모른다.


바로 그날 대한민국의 대통령은 지구 반대편으로 날아갔다. 열흘이 넘는 긴 일정이다. 대통령도 없는 광화문에 경찰은 엄청난 차벽을 쌓았다. 국민을 구하는 데 그토록 인색했던 공권력은 국민을 막는 데는 빈틈이 없었다. 


격리를 통한 망각을 유도하는 차벽은 ‘잊혀짐’의 상징이다. 여당은 ‘잊혀짐’을 시도하고, 야당은 방조한다. 언론은 ‘잊혀짐’의 주연이었다. 명백한 비리도 ‘논란’과 ‘공방’이란 이름으로 포장하고, 다른 이슈가 터지면 흐지부지 됐다. 


‘성완종 리스트’는 어느새 ‘이완구 비리’로 둔갑했고, 총리 사퇴를 통해 정리될 가능성이 크다. 대통령이 돌아올 때 즈음이면 여야는 임박한 재보선에 주력할 테고, 언론은 분위기를 주도할 것이다. 그런 행태가 기자들을 욕먹게 했고, 저널리즘의 위기를 초래했다.


‘성완종 리스트’ 사건은 모처럼 우리 언론이 제 역할을 한 특종이었다. 한 기업가이자 정치인이 스스로 목숨을 끊기 직전 작심하고 털어놓은 권력 핵심부의 추악한 이야기는 총리 한명의 사퇴로 끝날 일이 아니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는 정말 진실의 끝을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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