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남미 뒤흔드는 '분노의 물결'

[글로벌 리포트 | 남미] 김재순 연합뉴스 상파울루 특파원

중남미 지역에서 국제 원자재 가격과 유가 하락에 따른 경제성장 둔화와 고질적인 부패·비리 스캔들, 치안 불안 등에 대한 불만이 갈수록 커지고 있다. 다른 쪽에서는 2000년대 초반의 고도성장 시기를 거치면서 형성된 이른바 ‘신 중산층’이 누적된 불만을 변화로 해결해야 한다며 갈수록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중남미 사회 저변의 이 같은 움직임은 대규모 반정부 시위로 나타나 ‘분노의 물결’을 이루고 있고, 이는 중남미 각국의 정권을 위협하는 요인이 된다는 진단이 나오고 있다.


중남미 각국은 지난 2008년부터 시작된 금융위기의 충격을 완화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경기부양책을 사용했다. 이 과정에서 각국 정부는 재정을 소진했고 지금은 고통스러운 긴축 정책으로 허리띠를 졸라매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경제성장 둔화는 고통을 가중하고 있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중남미 지역의 성장둔화가 5년째 계속될 것으로 내다보면서 올해 성장률을 0.9%로 예상했다. 중남미 최대 경제국 브라질은 마이너스 성장이 불가피할 것으로 보이고, 멕시코도 성장 전망치를 낮추고 있다.


세계은행(WB) 자료를 기준으로 지난 10년간 중남미 전체 인구에서 중산층 비율은 50%를 넘어섰다. 중남미에서 중산층이 빈곤층보다 많아진 것은 사상 처음이다. 그러나 경제성장 둔화와 정부의 재정능력 약화는 중산층에 “빈곤층으로 되돌아갈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조성했고, 이는 정권에 대한 지지율 추락으로 나타나면서 정국 혼란의 원인이 되고 있다.


미국 워싱턴에 본부를 둔 연구기관 ‘미주 대화(Inter-American Dialogue)’의 피터 하킴 명예소장은 최근 브라질 언론과 인터뷰에서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기대치가 높아진 상황에서 맞은 경제적 어려움이기 때문에 불만이 더 클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서민 대중의 불만이커질수록 정권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고 결국에는 정권교체의 동력이 될 수 있다는 지적도 잊지 않았다.


멕시코의 엔리케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지난 2년 사이 천국과 지옥을 오갔다. 취임 초기 강력한 개혁과 지속성장을 통한 ‘멕시코의 현대화’를 약속한 페냐 니에토 대통령은 국민으로부터 두터운 신망을 얻었다. 그러나 강력범죄 증가와 기대 이하의 성장, 정치권 부패는 그의 발목을 잡았다. 최근 여론조사에서 국정운영에 대한 긍정 평가는 39%에 그쳤다.


브라질에서는 국영에너지회사 비리 스캔들과 저조한 성장 실적 등이 겹치면서 지우마 호세프 대통령의 지지율이 30% 아래로 추락했다. 지난 3월15일에는 1980년대 대통령 직선제 투쟁 이후 최대 규모의 시위가 벌어졌다. 야권은 대통령 탄핵을 공개적으로 주장하면서 호세프 대통령에 대한 압박 수위를 높이고 있다.


크리스티나 페르난데스 아르헨티나 대통령은 지난 2011년 54%의 득표율로 재선에 성공하고 나서 지지율이 한때 70%대를 기록했으나 지금은 40%를 밑돈다. 마이너스 성장 전망과 치솟는 물가, 통화가치 폭락 사태가 이어지면서 페르난데스 정권은 이미 신뢰를 잃었다. 


중남미의 모범 국가로 일컬어지는 칠레의 사정도 크게 다르지 않다. 미첼 바첼레트 대통령은 최근 여론조사에서 29%의 지지율을 기록하며 정치 인생 최대 위기를 맞았다. 각종 개혁입법과 개헌 추진, 개각 등으로 반전을 시도하고 있으나 자신의 아들 부부까지 연루된 권력형 비리 스캔들이 터지면서 궁지에 몰렸다.


이밖에 콜롬비아, 코스타리카, 과테말라, 페루, 베네수엘라의 대통령도 지지율 추락으로 전전긍긍하고 있다. 특히 정부의 재정난과 고물가, 생필품 부족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빠진 베네수엘라는 올해 말 의회선거에서 야권 우세가 점쳐지면서 정국이 극도로 불투명해지고 있다.


현재 중남미 지역에서 나타나는 현상을 좌파정권의 퇴조로 해석하는 견해도 있다. 그러나 속사정을 들여다 보면 좌파와 우파 정권 모두 위기에서 자유롭지 못한 처지다.


국제문제 전문가들은 중남미 각국 정권이 직면한 위기의 원인을 정치적 무능에서 찾는다. 집권당이 무능하지만, 그렇다고 야권이 유능한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중남미 각국에서 벌어지는 시위는 대부분 기성 정치세력과는 무관한 시민·사회단체에 의해 주도되고 있고,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가 소통의 공간으로 기능한다. 중남미 지역에서도 무능한 정치가 설 자리는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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