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재 수학소녀’ 소동의 뒷맛이 쓰다. 한국의 뿌리 깊은 학벌주의와 ‘받아쓰기’ 언론의 부끄러운 자화상이 또다시 드러난 사건이었다.
발단은 미주지역 한 매체의 지난 2일 보도였다. 수재들만 입학한다는 미국 모 고교에 재학 중인 김 모양이 명문으로 손꼽히는 하버드대와 스탠퍼드대에서 동시에 입학허가를 받았다는 내용이었다. 교육열 높은 한국사회에는 ‘신데렐라’같은 이야기였다. 국내 언론들이 소식을 재빨리 받아 대서특필했다. 김 양과 그의 아버지는 화제의 인터뷰 주인공이 됐다.
이 과정에서 김 양의 주장을 검증 취재한 언론은 없었다. 합격 여부를 제3자인 해당 대학이나 교수에게 물어보지 않고 최초 보도와 당사자의 주장만 반복했다. ‘미국 학벌 사다리의 최정점에 오른 한국인’이라는 자아도취적 뉴스에 홀린 듯했다. 그러다 의문을 품은 한 일간지 특파원의 보도로 일주일 만에 허상이 폭로됐다. 김 양을 서로 데려가려 한다는 교수나 대학은 애시당초 존재하지 않았다. 이 특파원은 “‘당신은 보도하기 전에 당연히 크로스체크를 해야 한다’는 기자의 기본수칙을 미국의 젊은 수학자에게 듣게 되는 심정은 참담했다”고 토로했다. 한국 언론에 잘못 알려진 사실을 바로잡고 싶었던 하버드대 공보팀장은 “먼저 연락 줘서 정말 고맙다”고까지 말했다고 한다.
애당초 기자가 단 한 통의 확인 전화만 걸었더라도 이런 소동은 벌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학벌이라는 한국사회의 ‘열망’의 지점이 저널리즘에는 ‘맹점’이었다. 사실 확인에 엄정했어야 할 언론은 대중만큼이나 이 학벌 판타지에 도취됐다. 뒤늦게 허위사실이 알려지자 분개한 것은 독자들이었다. “철없는 10대의 거짓말로 끝났을 일에 전 국민이 속아 넘어간 것은 언론 탓”이라는 질타가 쏟아졌다. 언론은 ‘학벌’이라는 체제를 무비판적으로 재생산한 격이 됐다.
취재원 편향에 빠질 위험은 대부분의 기자들이 겪는다. 자신이 지향하는 가치나 감정적으로 강하게 동화하는 사안에서 특히 그렇다. 미국 롤링스톤의 ‘버지니아대 집단 성폭행’ 기사도 그런 사례였다. 캠퍼스 성범죄에 대한 사회적 경각심이 높던 지난해 11월, 이 매체는 ‘재키’라는 가명의 여성이 남성 사교클럽에서 피해를 입었다는 기사를 실어 폭발적 반응을 얻었다. 확인 과정에서 뒤늦게 기자가 피해자의 신뢰성에 의문을 품었으나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잡지는 기사를 철회하면서 왜 이 같은 일이 벌어졌는지 제3기관에 조사를 의뢰했다. 지난 4월 나온 보고서의 결론은 간단했다. ‘저널리즘의 오래된 기본을 지키지 않은 탓’이었다.
이처럼 기본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신속하게 속보를 전해야 한다는 ‘빨리빨리’ 강박증까지 결합되면 오보는 피할 수 없는 일상이 되고 만다. 여러 온라인 매체와 종합편성채널이 페이지뷰와 시청률 경쟁에 합세하면서 언론 지형은 더더욱 속도전에 내몰리고 있다. 그래서인가. 불과 1년여 전 세월호 참사 당시 ‘학생 전원 구조’라는 희대의 오보를 내고 자성하는 듯했던 한국 언론에서 근본적 변화는 찾아보기 어렵다. 김 양의 명문대 소동은 그 방증이다. 가장 최근엔 중동급성호흡기증후군(MERS)에 감염된 35번째 의사 환자가 사망했다는 대형 오보 역시 한국 언론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한국 언론의 공신력에는 이미 ‘거대한 물음표’가 걸려 있다. 작지 않은 실수들이 누적되어가고 있다. 신뢰를 쌓아올리는 데에는 오랜 세월이 걸리지만 잃는 것은 순식간이라는 공동의 위기감으로 언론이 스스로를 구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