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욕타임스 특파원이라고 다를 게 없어…기자 직업에 충실할 뿐"

[기자 25시](22) 최상훈 뉴욕타임스 한국특파원

친구 따라 시험 봤다가 기자 시작
연수·유학 경험 없는 순수 국내파
코리아헤럴드·AP통신 거쳐 NYT 근무

기수·선후배 구분 없는 뉴욕타임스
기사 두고 편집국장과 언쟁 다반사
저널리즘 위한 것 당연하게 받아들여

디지털퍼스트로 지면 비중 줄어
내 기사 지면에 들어갔는지 찾지 않아
웹사이트서 가장 많이 봤는지 확인



“기자를 보면 기자 같고, 형사를 보면 형사 같고, 검사를 보면 검사 같이 보이는 자들은 노동 때문에 망가진 것이다. 뭘 해먹고 사는지 감이 안 와야 그 인간이 온전한 인간이다.”


의외였다. 기자 같아 보이지 않았다. 십여 년 전 김훈 작가가 자신의 에세이집에 썼던 위 구절이 반사적으로 떠올랐다. 인터뷰 약속일에 앞서 취재차 한국프레스센터에 들른 최상훈 뉴욕타임스 한국특파원을 잠시 본 첫 인상은 그랬다. 궁금했다. 퓰리처상을 받은 ‘뉴욕타임스(The New York Times)’의 한국인 기자는 어떤 사람일지. 언론계 종사자가 아니어도 퓰리처상은 안다. 뉴욕타임스는 들어봤다. 거기다 토종 한국인이라니. 꼬리를 물던 궁금증은 짧았지만 강렬(?)했던 첫 인상에 더욱 커졌다.


마침내 인터뷰 예정일인 지난달 29일 서울시 중구에 위치한 뉴욕타임스 한국지부를 찾아 그의 하루를 관찰할 수 있었다. “그저 기자의 일이 갖는 직업윤리에 충실하고 싶다”는 바람대로 그의 하루에서 거창함이나 화려함을 찾긴 힘들었다. ‘진실의 추구’같은 대의가 아니라 제 몫의 일을 충실하게 해내는 담백한 자아가 엿보였을 뿐이다.

뉴욕타임스 기자의 하루
지난달 29일 10시쯤, 약속한 대로 뉴욕타임스 한국지부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 경상도 억양이 묻어나는 정겨운 말투가 기자를 살갑게 맞았다. 무채색 톤의 각진 사무실 인테리어와 고뇌하는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의 이미지를 떠올렸었다. 왠지 뉴욕타임스의 사무실과 기자라면 그럴 것 같았다. 하지만 역시 의외였다. 이런저런 세간이 여기저기 놓인, 익숙한 풍경의 70㎡ 남짓한 공간에서 최 기자가 푸근하고 사람 좋은 얼굴로 인사했다. 그는 멋쩍은 얼굴로 미안하다는 말부터 했다.


“어휴, 어떡하죠? 취재하고 기사 쓰는 모습을 보여드려야 되는데 오늘은 사무실에만 있어야 할 것 같은데요. 본사에서 행정업무 처리해 달라는 게 많아서…”


평소 같으면 취재를 위해 움직일 시간이지만 하필 이날 새벽 갑작스런 연락이 와서 그동안 미뤄놨던 행정업무를 마무리 지으라고 독촉해 왔단다. 영수증 지출내역 정산 처리와 남은 휴가일 파악 등이 그가 이번 주 내 처리해야 할 일이다. 행정업무를 도와줄 인력이 따로 없는 만큼 혼자 모든 걸 다 처리해야 한다.


그는 현재 ‘뉴욕타임스’와 뉴욕타임스의 아시아판인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의 한국특파원직을 맡고 있다. 한국특파원은 단 한 명. 그나마 2005년 그가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현 ‘뉴욕타임스’의 아시아판인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에 입사하기 전엔 아예 없었다. 혼자 남북한 전체를 커버하고, 때로는 다른 아시아 지역까지 담당한다. 아시아판 기사를 오후 7시까지 마감하는 게 그의 일이다. 갑작스런 큰 사건사고가 발생하지 않는 한 기사 관련 판단과 송고 여부는 전적으로 기자 본인이 결정한다.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다. 사안의 경중과 북미지역 관련 정도를 따져 아시아판 기사 중 일부는 다음날 오전 6~7시(우리 시각) 본판 게재가 확정될 수 있다. 이러면 새벽에도 시간 대중없이 연락이 온다. 팩트 체크와 표현 수위 조절, 추가 취재는 물론 수정 요구까지 내려온다. 만일 아시아판 마감 이후 큰 일이 터졌다면 기사를 작성해 본판으로 곧장 보낸다. 시간 활용은 유동적이지만 한국 지역 사건사고 보도 전체에 대해 책임을 지는 셈이다.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질문이 많아요. 기자 본인의 의견을 묻고 직접 수정까지 해주길 요구해요. 본사 기자가 남북한 관련 기사를 썼을 때는 적절한 건지 자문까지 해요. 오늘 아침만 해도 월남전에서 한국군이 베트남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보도를 두고 표현이 적절한 건지 물어왔어요. 배려한다고 최대한 늦게 연락하는 데도 13시간 시차가 있다 보니 그게 오전 5~6시인 경우가 많아요. 솔직히 내 기사도 아닌데 꼭두새벽에 전화하면 좀 짜증날 때도 있죠.(웃음)”


말을 이어가던 최 기자가 잠시 양해를 구했다. 이날 본사에서 기자들을 대상으로 한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정신과상담을 꼭 받으라고 요청했고 막 담당자가 캐나다 토론토에서 ‘스카이프(Skype)’로 연락해 온 참이었다. 세월호 참사와 메르스 사태 현장에서 뛰어다니던 국내 기자들을 봐온 터라 왠지 부러운 광경이었다.

“외국인에게 한국 이해시키는 것”
앞서 지난달 27일 오후 최 기자는 서울 중구 한국프레스센터를 찾았다. 한국전쟁 직후 남도 북도 아닌 제3국을 선택한 전쟁포로들의 이야기를 담은 모 다큐멘터리 영화의 취재를 위해서였다. 실제 당시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수용됐다가 중립국으로 떠났던 두 할아버지도 노구를 이끌고 자리했다. 한참을 취재하던 최 기자의 표정에서 불만이 느껴졌다.


“할아버지 개인들만의 이야기로는 충분히 기사거리가 되죠. 외국에서 충분히 관심 가질만한 스토리고요. 그런데 영 뒷맛이 개운치 않아서 (기사를) 쓰진 않을 거 같아요.”


사전에 PR회사를 통해 외신기자들에게만 연락이 왔었단다. 국내 언론들은 정치적인 논쟁만 벌일 수 있으니 제외하고 외신들에게만 특혜를 주는 거니까 취재해달라는 식으로. 최 기자는 “혹시나 해서 와봤는데 역시나 감독이나 제작자 홍보만 하는 게 될 거 같아요. 그냥 영화를 찍으러 온 거죠. 할아버지들의 북한방문까지 추진하겠다는 말도 허무맹랑하고요”라고 꼬집었다.


최 기자의 말대로 남북의 분단과 이데올로기 문제, 그로 인해 희생당한 민초들의 스토리는 외신들이 우리나라 관련보도에서 자주 다루는 단골메뉴다. 조금 과장하자면 이와 관련된 것 말고 관심 갖는 소재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할 정도다. 해외 소식 중 국내 언론에서 선택해 보도하는 뉴스들이 몇 가지 한정된 소재를 벗어나지 못하고 반복되는 것과 같은 궤다. 독자들이 한국을 전혀 모르는 외국인인 만큼 이런 맥락은 외신기자들이 기사거리를 선택하는 한계이자 출발점이 된다.


“결국 외신기자는 한국이란 나라를 외국인이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는 일들을 그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전하는 게 아닌가 싶어요. 한국사회의 단면을 보여주는 사건이나 현상을 설명하거나 분석하는 기사를 통해서요. 우리들은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부분들을 자세하게 적어놓으니까 외신기사들은 번역해놓고 보면 국내독자 입장에선 내용이 없는 경우도 많아요.”


외국인 기자들에겐 그야말로 ‘노다지’일 수 있다. 우리들에겐 일상의 풍경으로 아무런 자극도 주지 못하던 것들이 벽안의 시선에는 ‘총천연색’의 자태 그대로 보일 수 있어서다. 하지만 울산 출신에 초·중·고는 물론 대학, 대학원까지 국내에서 나온 토종 한국인 최 기자에게는 훈련이 필요한 과정이었다.


시작은 1991년 영자신문 ‘더 코리아 헤럴드’ 입사였다. 통번역대학원에 같이 다니던 친구 따라 시험을 봤고, 기자가 됐다. 입사까지 함께 하게 된 이 친구는 정작 한 달 만에 관뒀고 그만 남았다. 영어신문사로 경력의 첫 발을 떼고 나니 이후에도 외신 쪽에서만 일하게 됐다.


AP통신의 서울특파원으로 활동하던 2000년 그동안의 훈련의 성과가 빛을 발했다. 한국전쟁 시기 미군의 노근리 양민학살 관련 보도로 퓰리처상을 받았다. 한국언론에서 보도되던 주민들의 증언에 더해 이에 대한 미국 작전명령서 등 공식문서를 최초 확인한 보도였다. 보도 후 양국 정부가 같은 시기 이 사안에 대한 공동조사를 벌이는 등 사회적인 반향도 컸다.


2005년 ‘인터내셔널 헤럴드 트리뷴(현 ‘인터내셔널 뉴욕타임스’)’으로 직장을 옮긴 뒤엔 2007, 2008년 각각 미얀마 승려들의 시위와 군부의 진압, 미얀마를 덮친 사이클론 나기스 관련 밀착보도로 ‘아시아 소사이어티’에서 수여하는 오스본 엘리엇상 등을 받기도 했다. 최 기자는 “상복이 많았던 것 같아요”라고 짧게 말했다. “사람 인연이 어찌될지 모른다는 생각을 많이 하게 돼요. 경찰국가인 미얀마 취재 시에도 친구의 친구와 인연이 있었던 현지인들이 단지 그 사람의 이름만으로 목숨을 걸고 물심양면 도왔거든요.”

뉴욕타임스는 웹사이트에 딸린 신문
“어떤 기자들은 너무 잘나서 대화가 안 돼요, 대화가(웃음). 국내 언론과는 굉장히 다른 조직문화죠.”
1851년 창간해 세계 어느 언론사보다 많은 117회의 퓰리처상 수상자를 배출한 신문사의 분위기에 대해 최 기자는 이렇게 설명했다. 최 기자는 뉴욕타임스 기자들이 굉장히 프라이드가 강하다고 했다. 뉴욕타임스나 워싱턴 포스트 같은 유수 언론들을 정점에 놓고 차근차근 경력을 쌓아 이직하는 방식이 미국 언론계의 보편적인 풍토이다 보니 뉴욕타임스까지 온 기자들은 ‘자존심 센 잘난 놈’들이 많다고 했다.


더욱이 경력기자가 대부분인 만큼 입사시기에 따른 기수 구분, 선후배에 대한 인식도 거의 없고 기사를 두고 기자와 편집국장이 언쟁을 벌이는 경우도 다반사라고 했다. 국제문제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도 다른 점이다. 뉴욕타임스 기사는 국제뉴스를 담은 A섹션이 1면 바로 뒤에 온다. 실제 편집국장 등 요직으로 승진하는 인사도 국제부 출신이 많다고 했다.


“사실 안에서 보면 다른 직장인들이 그러는 것처럼 ‘뭐 이런 곳이 있나’ 싶을 만큼 문제가 많아요.(웃음) 다만 저널리즘이라는 걸 위해서 이만큼 투자하는 데가 드물고 또 그걸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부분이 좀 다른 점이랄까요.”


저널리즘이외에 뉴욕타임스의 행보 중 주목받는 분야는 ‘디지털 퍼스트’다. 활발한 디지털 퍼스트 행보는 지난해 유출된 혁신 보고서가 국내외 업계 전체를 들썩이게 만들면서 우리에게도 잘 알려져 있다. 최 기자는 뉴욕타임스 웹사이트에 소개됐던 새로운 슬로건 ‘클릭에 적합한 모든 뉴스를 다룬다(All the News That's Fit to Click)’에 대해 얼마나 실감하고 있을까. 최 기자는 “뉴욕타임스는 신문에 딸린 웹사이트가 아니라 웹사이트에 딸린 신문”이라고 단언했다.


“편집회의에서 지면 기사에 관심을 기울이는 비중이 확실히 줄었다는 걸 체감해요. 아예 회의를 없앴다는 얘기도 들리던데요. 저만 해도 요즘 제 기사가 지면 어디에 들어갔는지 찾아보지도 않아요. 웹사이트에서 가장 많이 봤거나(most viewed), 가장 많이 피드백이 온(most emailed) 기사에 포함됐는지를 확인하죠.”


최 기자에게 외신기자로서 최근 국내 사건사고 중 가장 충격적인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최 기자는 세월호 참사를 꼽았다. 당시 외신 보도만 믿을 수 있다는 말들이 나왔다는 얘기를 들려주며 이에 대한 그의 생각을 물었다. 그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면서 정파 전체를 아우르고 사안의 추지 전체를 조명해 주는 언론에 대한 수요가 있는 것 같다고 조심스레 말했다.


“사실 그런 언론이 필요하죠. 수요도 분명히 있고요. 그런데 돈이 안 되니까. 또 현재 방식을 강제하는 시스템이 굳건하니까. 몰라서 안 하는 게 아닐 거예요. 외신기자들은 국내언론처럼 보도하면 기사가 안 나가니까 또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안 그러는 거거든요. 특별한 구석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니라.”


만53세의 나이로 여전히 필드에서 뛰고 있는 최 기자에게 마지막으로 꿈이 무엇인지 물었다. 그는 이제까지의 경력 중 가장 오래 일했던 AP통신(11년)보다 뉴욕타임스에서 더 오래 일하게 될 것 같다고 얘기했다. 한국을 가장 잘 드러내는 단면을 통해 한국을 알릴 수 있는 기사 아이템 2~3개 정도를 구상하고 있다고 했다.


“사무실에서 데스크 업무만 보라고 했으면 진작에 그만뒀을 거 같아요. 혼자 모든 걸 다 처리해야 하는 지금이 너무나 좋고요. 진실의 추구 같은 거창한 목표가 아니라 그냥 이 일이 갖는 직업윤리에 충실한 채로 꾸준하고 성실하게 일하고 싶어요. 제가 그건 잘 하거든요.” 퓰리처상을 받은 뉴욕타임스 기자다운 말이라 생각했다. 담백한 바람에 앞으로 그의 일상이 궁금해졌다. 그가 마주할 특별한 순간보다도 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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