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상가상(雪上加霜)에 첩첩산중(疊疊山中)이다. 개선의 여지, 희망의 조짐이 도무지 보이지 않는다. 체념과 좌절이 쌓여갈수록 일상은 무기력해지고 변화의 열망은 무뎌진다. 새 사장 선임을 앞둔 공영방송 KBS의 이야기다.
지난 14일 마감된 차기 사장 공모 지원자 14명의 명단이 공개된 뒤 KBS 구성원들은 참을 수 없는 실망감을 쏟아냈다. 대부분 지난해 공모에 출사표를 던진 바 있는 이른바 ‘단골 후보’들인 까닭이다. 그 가운데는 ‘표적 심의’ 논란을 일으켰던 권혁부 전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부위원장과 ‘편파 방송’ 논란을 불러왔던 이정봉 전 KBS 비즈니스 사장도 포함됐다.
심지어 고대영 전 보도본부장과 홍성규 전 방송통신위원회 부위원장은 지난해 사장 공모 당시 언론노조KBS본부(이하 KBS본부)가 ‘부적격 후보’를 넘어 ‘절대불가 후보’로 지목한 바 있다. 후보자 명단을 접한 실망감은 그 어느 때보다 깊고 무거울 수밖에 없다.
지금 KBS가 처한 현실은 어떠한가. 최근 KBS본부가 실시한 조대현 사장에 대한 신임 투표에서 조합원의 80% 이상이 조 사장을 불신임 했다. 지난해 유례없는 KBS 양대 노조의 공동 파업으로 길환영 전 사장이 퇴진한 뒤 공모 절차를 거쳐 취임한 사장이 불과 1년 여 만에 ‘불신임’이란 오명을 쓰게 된 것이다.
조대현 사장은 사석에서 투표 결과에 대한 불쾌감을 여러 차례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지만, 그만큼 KBS의 ‘민심’은 싸늘했다. 조 사장은 최근 이승만 정부 망명설 특종 보도에 대한 징계성 인사와 ‘훈장’ 프로그램 불방으로 공정보도의 근간을 적극적으로 훼손해 스스로 갈등 국면을 초래했고, ‘대개편’ 실패에 따른 콘텐츠 경쟁력 하락과 수신료 인상 실패 등으로 대내외 신뢰를 상실했다. 임기 만료를 앞두고 KBS 구성원들이 새 사장에 대한 기대를 가질 수밖에 없는 이유를 제공한 장본인인 셈이다.
하지만 이 당연한 기대는 지원자 명단이 알려지면서 여지없이 무너졌다. 지난 15일 ‘시민사회가 바라는 KBS 사장의 자격’을 주제로 열린 간담회에서 KBS 내 기자, PD, 기술인, 경영 등 4대 협회는 ‘14명 후보 중에 단언컨대 한 명도 사장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다’고 논평했다.
KBS 내부의 분위기를 적나라하게 드러낸 평가인 셈이다. 오죽하면 ‘불신임’ 선고를 받은 조대현 사장이 그나마 제일 낫다는 자조 섞인 한탄이 나올 정도였을까. 문제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또다시 사장 선임 절차의 문제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사장을 사실상 선임할 권한을 가진 KBS 이사회는 여야 추천 이사 구성이 7 대 4로 여당 측이 일방적으로 우세하다는 구조적 불균형을 내재하고 있다.
이사회가 ‘절대 다수제’를 통한 사장 선출 방식을 고수하는 한 KBS 사장은 언제나 정권이 선호하는 인사를 임명한다는 세간의 오해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 때문에 야당 추천 이사들이 재적 3분의 2 이상의 찬성이 필요한 ‘특별 다수제’ 도입을 줄기차게 요구해 왔지만 번번이 묵살됐고, 사장 공모철마다 유사한 성향의 문제적 후보자들 일색으로 명단이 채워지는 악순환은 끊이지 않고 있다.
공영방송은 시청자로부터 징수한 수신료가 주재원(主財源)이므로 권력과 자본으로부터 가장 자유로운 영역이어야 한다. 그럼에도 이 공영방송의 수장들은 지금까지 ‘청부사장’ ‘특보사장’ ‘관제사장’ ‘낙제사장’ 등의 불명예스런 ‘별명’을 생산해가며 공공의 이익에 부합하는 언론사의 위상을 훼손해왔다.
일각에서는 새로이 선임될 사장을 통해 본격적인 공영방송 무력화 시도가 시작될 것이란 어두운 전망까지 내놓았다. 새 사장 선임 국면마다 KBS 구성원들은 공연히 움츠러드는 불행한 역설이 계속되는 한 시청자로부터 신뢰 받는 공영방송은 대한민국에 결코 존재할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