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 후배들을 만난 자리에서 술값으로 호기롭게 40만원을 결제했다가 아내에게 추궁을 당한 일이 있다. 내 핸드폰에 저장된 카드결제내역 문자메시지를 본 아내는 결제금액보다 그 돈이 어디서 났는지 따졌다. 그 돈은 월급을 부부공동의 생활비 통장으로 보낼 때마다 몰래 조금씩 떼어 모아둔 비자금이었다. “꼭 써야 할 때 궁색해 보이기 싫었다”고 변명했지만 “꼭 필요할 땐 군말 없이 줄 테니 말을 하라”는 핀잔만 들었다.
‘정당한 비자금’은 존재할 수 있을까? 고개를 갸우뚱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어느 모로 봐도 정당하다는 말은 비자금이라는 단어 앞에 세우기엔 적절해 보이지 않는다. 떳떳한 돈이라면 굳이 비밀스레 운용할 필요가 없을 터이다. 하물며 부부 사이에서도 들통 날 경우 적잖이 설명하기가 곤란한 돈 아니던가. 돈을 어디다 썼든 간에 수입을 공유하고 지출을 합의하기로 한 계약 위반임은 명백해 보인다. 주주들의 투자금으로 이윤을 창출하는 기업의 경우 이 문제는 조금 더 공적 성격을 띠게 된다.
우리는 그동안 기업의 비자금이 어떻게 조성되고 쓰여 왔는지 봐 왔다. 비용을 부풀리거나 수익을 축소 계상한 뒤 남는 돈을 빼돌리는 것은 조성의 일관된 방법이다. 주로 이 돈은 신규사업 진출, 각종 인·허가, 대출 등과 관련해 정치인·고위관료·금융인 등에게 뇌물성 자금으로 쓰인다. 재벌총수의 사재(私財)마냥 쓰이는 경우도 허다하다. 2002년 ‘차떼기’ 대선자금 수사부터 지난해 ‘성완종 리스트’ 사태까지 비자금은 정당했던 적이 없다. 돈에는 ‘안 될 일을 되게 만들어 달라’는 메시지가 담기기 때문에 경제구조는 그만큼 왜곡된다.
그래서인지 비자금 사건 판결문에는 항상 ‘근절돼야 마땅한’이라는 수식어가 붙는다. 그러나 처벌에는 점점 인색해 지고 있는 듯 하다. 물론 법원을 탓할 수만은 없다. 기업이 비자금을 운용하는 방식부터 교묘해지고 있다. 회계장부가 전산화되면서 과거 검찰 수사의 단초가 됐던 ‘비밀장부’는 사라진지 오래다. 일단 비자금 사건을 맡으면 회사 내 온갖 영수증부터 모은다는 얘기는 변호사 업계의 공공연한 비밀이다. 회사 일에 돈을 썼다는 점을 증명하기 위해서 실제 비자금의 사용처와 관련 없는 영수증까지 모두 확보하고 시작한다는 말이다.
게다가 비자금 관리에 관여한 임직원은 검사의 추궁에 입을 닫는다. 기업 사건을 주로 맡는 한 변호사는 “입을 닫아 받게 될 위험(Risk)보다 이후 회사의 보상이 더 확실한 편”이라고 말했다. 검찰 입장에서는 비자금의 사용처를 찾아내기가 그만큼 어려워진다. ‘애매한 때는 피고인의 이익으로’라는 명제가 적용된다. 검사들 입에서 “비자금 사건에서 검사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입증책임을 지고 있다”는 하소연이 나올 법하다.
최근 대법원에서 파기환송된 이재현 CJ그룹 회장 사건에서도 600억원대의 비자금을 둘러싼 1심과 2·3심의 판단은 갈렸다. 1심은 “정상적인 회계처리가 불가능한 접대비·선물비는 결국 회사운영과는 무관한 것일 가능성이 크다”며 유죄로 봤다. 반면 2심과 대법원은 “회사의 원활한 운영과 임직원 사기진작을 위해 쓰여 온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판단했다.
판결문을 보면서 다시 ‘정당한 비자금’에 가졌던 의문으로 돌아간다. 왜 정당하게 쓰인(또는 쓰일) 돈을 비밀스럽게 관리했을까. 그 돈은 정말 회사를 위해 오롯이 쓰였을까? 아무래도 앞뒤가 맞지 않는다. 이 간극을 돌파하는 건 다시 검찰의 몫일 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