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벽을 넘어서려면

[언론 다시보기] 김준현 변호사

지난 14일 서울 도심의 민중총궐기 집회에 대해 정부는 불법집회라며 대대적인 수사에 나섰다. 애초 신고된 내용과 다르게 광화문 광장으로 진출하면서 폴리스라인으로 쳐놓은 차벽과 대치하면서 물리력을 사용했다는 이유다. 집회 주최 측은 차벽은 위헌결정을 받은 위법한 공권력의 행사이며, 위법한 공권력에 저항하는 것은 국민의 정당한 저항권이라고 맞서고 있다. 일부 언론은 정부 입장 그대로 연일 불법집회라며 부각하기에 바쁘다.


공권력이 집회나 시위행렬을 막기 위해 차벽을 사용한 것은 오래됐지만 대대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2008년 광우병 촛불집회 때 등장한 이른바 ‘명박산성’이 최초라 할만하다. 집회나 시위가 열리기도 전에 아예 60여개의 거대한 컨테이너 박스로 광화문 대로를 막았다. 명박산성은 ‘국민과의 불통’을 의미했다. 2009년에는 고 노무현 대통령 추모집회 때 서울시청 광장을 차벽으로 둘러쌓아 시민들의 통행을 원천 차단했다. 이에 대해 헌법재판소는 “시민들의 일반적 행동자유권을 침해하였다”며 위헌이라고 판단했다. 차벽은 ‘불통’을 넘어 ‘위법한 공권력’의 상징이 됐다.


그러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헌재 결정은 뒷전으로 하고 세월호 참사 추모 등 대규모 집회가 개최될 때마다 공권력은 아무런 거리낌없이 겹겹이 차벽을 만들었다. 헌재 결정문에서 언급한 “몇 군데라도 통로를 개설하고”라는 문구에만 초점을 맞춰 사람 한 명 정도는 빠져나갈 통로를 차벽 사이로 만들었으니 위헌성은 제거됐다고 주장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는 헌재 결정의 핵심을 의도적으로 무시한 주장이다. 헌재는 “집회의 조건부 허용이나 개별적 집회의 금지나 해산으로는 방지할 수 없는 급박하고 명백하며 중대한 위험이 있는 경우에 한하여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거의 마지막 수단에 해당한다”고 판단하였다. 이 판단은 2009년 6월3일 서울시청 광장의 차벽뿐만 아니라 2015년 11월14일 세종대로 차벽에도, 그리고 앞으로도 적용되어야 할 헌법적 명령이다. 그러나 과거 사례에서 보듯 공권력은 대규모 집회가 예정되면 그 주변에 미리 차벽을 설치했다. ‘급박하고 명백하며 중대한 위험’이라는 공권력 발동의 정당성 근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래서 차벽은 집회 참가자들에게, 그리고 집회의 내용에 공감하는 수많은 시민들에게 공권력의 ‘위법성’을 의미하는 상징이자 저항권 행사의 분출구가 됐다.


집회 이후 행진을 하던 시민들이 차벽 앞에서 분노를 표출한 것은 정당한 저항권의 행사라고 보아야 한다. 하지만 정부와 보수언론은 일부 시위자들의 과격행동을 근거로 시민들의 저항을 불법으로 포장한다. 경찰의 자체 규정도 지키지 않은 살수포 직사로 참가자 1명이 여전히 사경을 헤매고 있는 사실은 아랑곳하지 않고 있다. 10만명이 넘는 시민들이 왜 모였는지, 무엇을 요구했는지도 애써 무시한다. 다만 쇠파이프와 밧줄, 파손된 버스차량을 반복적으로 보여주며 폭력성만 부각할 뿐이다.


정부와 보수언론은 ‘위법한 공권력’의 상징인 차벽을 ‘폭력으로부터 사회안전질서를 지키는 보루’로 이미지 치환하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있다. 위헌적인 공권력의 상징이던 차벽을 시민의 정당한 저항권을 불법으로 매도하는 왜곡된 상징으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거짓 이미지는 객관적인 판단을 흐리게 만든다.


지금은 민주주의와 국민의 기본권이 차벽에 갇혀 있다. 물리력 차원에서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왜곡된 상징을 파괴하는 첫걸음은 실체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에서 시작한다. 어쩌면 차벽을 넘어서는 방법은 물리력으로 차벽과 부딪히는 것만이 아닐 수 있다. 차벽 자체를 무시함으로써 차벽의 왜곡된 상징에서 벗어날 수도 있다. 느리지만 길게 가는 것도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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