약속된 기준과 신뢰

[스페셜리스트 | 법조] 정현수 국민일보 사회부 기자

법조를 출입한 지 3년 반이 지났다. ‘기각’과 ‘각하’의 차이를 설명하지 못했던 풋내기는 이제 제법 법률용어를 들먹이며 취재원들과 말을 섞는 수준이 됐다. 그동안 만난 법조인들은 취재원이기 이전에 교사였다. 가끔은 직관적으로 이해하기 힘든 법의 오묘한 정신을 그들은 인내를 갖고 설명했다.


‘예측가능성’이란 개념이 그 중 하나였다. 쉽게 말하면 ‘어떤 범죄를 저질렀을 때 얼마나 처벌받게 되는지’를 사람들이 예측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굳이 트집을 잡아보려는 고약한 심보가 있어 대뜸 말했다. “이런 죄는 처벌이 가벼우니 저질러도 된다, 하는 것과 뭐가 다릅니까?” 앞에 앉은 판사는 “거기까지는 벌금인데, 넘어서면 징역이다, 라는 경고가 되지요”라고 말했다.


적절한 처벌기준을 만들고, 이를 알리는 작업은 2000년대 중반부터 법조계의 중요한 이슈였다. 수사하는 검사마다, 선고하는 판사마다 처벌 수위 편차가 크다는 지적 때문이었다. 피의자·피고인의 사회적 지위 등에 따라 결과가 다르다는 공분도 있었다. ‘모든 사건은 사람의 지문처럼 개별적’이라는 딜레마는 잠시 접어둬도 좋을 정도였다.


그렇게 2007년 만들어진 양형위원회는 살인죄를 시작으로 지금까지 32개 범죄군에 대한 양형기준을 제시했다. 감경·기본·가중 영역을 만들어 죄질에 따라 처벌구간을 설정했다. 판결의 90% 이상이 양형기준을 따르고 있다. 확실히 처벌 편차는 줄었고, 그만큼 예측가능성은 높아졌다. 납득하기 힘든 이유로 양형기준을 따르지 않은 판결은 이제 기사가 된다. 새누리당 김무성 대표 사위의 마약사건이 뒷말을 낳았던 것처럼 말이다.


그럼에도 완성이라 하기엔 이르다. 마약범죄와 상해와 폭행범죄, 유기·학대, 불법체포·감금 등 일부 기준에서는 감경구간의 상한이 가중구간의 하한을 초과한다. 죄질에 따라 구간을 나눠둔 것일 텐데, 어떤 경우에는 처벌이 역전되는 현상이 발생할 수 있는 셈이다. 게다가 대부분의 양형기준은 감경구간의 상한과 가중구간의 하한이 맞물려 있다. 중간에 낀 기본구간은 아래로도 위로도 다른 구간과 겹친다. 한 검찰 간부는 “여전히 법관의 재량을 많이 허용하고 있다는 것”이라고 했다.


김수남 검찰총장은 보다 선명하게 금을 긋고 싶어 하는 눈치다. 대검찰청 공판송무부에 양형기준 태크스포스팀을 만들고, 팀장에 이용 검사를 앉혔다. 사법연수원 20기인 이 검사는 직속상관이 된 대검 공판송무부장과 동갑이다. TF의 중요성을 염두에 둔 김 총장의 발탁 인사다. 또 서울고검장을 양형위원으로 추천하던 관행을 깨고 오세인 광주고검장을 추천했다. 전문성을 강화하기 위해 2년 임기를 보장했다고 한다. 납득할 만한 양형기준을 세우는 데 더 적극적으로 나서겠다는 의미다.


나아가 김 총장은 취임 직후부터 구속기준 확립도 강조하고 있다. 김 총장은 간부들에게 “지금 사기죄의 구속기준이 정립됐다고 말할 수 있습니까. 그런 질문에 우리들의 대답은 굉장히 궁해집니다”라고 말했다. 예컨대 같은 사기죄라 하더라도 피해액과 동기 등에 따라서 결과는 천차만별이다. 뚜렷한 기준이 없어 검사의 주관이 개입된 편차가 발생할 가능성이 열려 있는 셈이다.


양형기준이 수사와 재판의 마지막이라면 구속기준은 사법작용의 시작이다. 처음과 끝의 기준을 명확히 세워 사법작용에 대한 예측가능성을 높이겠다는 김 총장의 의중이 읽힌다. 결과에 따라 평생 그의 이름 밑에 달릴 업적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아직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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