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에 예금하려면 돈을 내야 한다. 대출자는 시간이 지날수록 갚아야 할 원리금이 줄어든다.’
이상한 나라의 엘리스에나 나올 법한 소설 같은 얘기가 현실화되고 있다. 전대미문의 마이너스 금리 시대가 도래하고 있기 때문이다.
유럽중앙은행(ECB)의 마리오 드라기 총재가 2014년 마이너스 금리 도입을 선언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도입된 양적완화(QE)가 시장에 대한 영향력을 잃자 꺼내든 특별 조치다. 이후 스위스, 덴마크, 네덜란드 등이 마이너스 금리를 채택했다. 이들 국가의 일부 장기국채 수익률은 마이너스를 기록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구로다 하루히코 일본은행(BOJ) 총재도 마이너스 금리를 도입한다고 선언했다. 금융기관이 BOJ에 일정액을 초과하는 예금을 맡기면 이자를 받는 대신 연 0.1%의 비용을 물어야 한다.
각국 중앙은행들이 천문학적인 돈을 뿌려대도 세계 경제는 오히려 디플레이션(물가 하락에 따른 경기침체)을 우려하고 있다. 통화 공급을 늘리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을 자극한다는 전통적인 통화론이나 화폐수량설은 폐기처분될 위기에 처했다.
세계 경제가 ‘유동성 함정(liquidity trap)’에 빠졌기 때문이다. 유동성 함정은 시중에 돈을 풀어도 가계의 소비, 기업의 생산이나 투자가 늘지 않아 경기가 나아지지 않고 마치 경제가 함정에 빠진 것처럼 보이는 상태를 말한다. 아무리 통화 공급을 늘려도 돈은 퇴장하거나 단기부동화돼 실물경제에 스며들지 않는다. 경기 불확실성이 높아 경제 주체들이 지갑을 닫기 때문에 벌어지는 현상이다.
유동성 함정이 전통적인 통화정책을 무력화시켰고 이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 경제학계의 뜨거운 관심으로 떠올랐다. 그 중 하나가 고액권의 폐지다. 사람들이 돈을 쓰지 않고 쌓아두는 데 고액권이 주요한 역할을 하고 있는 진단에서다. 고액권이 시장에서 돌기보다 현금 저장의 기능에 머무는 현상은 우리나라에서도 뚜렷하다. 한국은행에 따르면 발행 첫해인 2009년 5만원권의 환수율은 7.3%에 불과했다. 2011년 59.7%, 2012년 61.7%로 상승했지만 2013년 48.6%, 2014년 25.8%로 다시 줄었다.
일부 학자들은 ‘화폐 퇴출론’을 제기하고 있다. 화폐를 없애고 전자화폐(electronic money)로 대체하자는 주장이다. 종이화폐가 사라지고 전자화폐가 통용되면 집에 현금으로 쌓아두는 행위는 할 수 없게 된다. 사람들은 마이너스 금리를 피하기 위해서라도 최대한 돈을 쓸 수밖에 없어 통화 정책의 실효성이 높아진다는 논리다. IMF 수석 이코노미스트 출신인 케네스 로고스 하버드대 교수와 독일 정부의 경제자문역인 피터 보핑어 등이 대표적인 화폐 퇴출론자다.
일각에선 독일의 경제학자 실비오 게젤이 주창한 ‘프리 머니(free money)’를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도 하고 있다. 프리 머니란 시간에 비례해 가치가 떨어지는 화폐를 말한다. 20세기 초 게젤은 모든 현찰에 유효기간을 표시해 그 기간 내에 사용하지 않으면 휴지조각이 되도록 하는 법안을 제안했다.
이처럼 마이너스 금리 현상은 전통 화폐의 기능에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마이너스 금리는 최근의 핀테크(금융+정보기술) 혁명과 맞물려 ‘현금 없는 사회(cashless society)’의 도래를 앞당기는 모습이다. 마이너스 금리가 앞당기는 ‘화폐의 사망’은 예대마진에 안주해온 금융 산업의 기능과 생존에도 심각한 의문을 던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