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럼프와 미디어, 그리고 참회록

[언론 다시보기] 예병일 플루토미디어대표

대선 후보 지명절차만 남겨둔 미국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 그를 지켜보는 국내외 언론들의 모습이 착잡해 보인다. 그의 선거 캠페인만큼이나, 그를 바라보는 언론의 시각도 롤러코스터를 탔다.


미국의 언론부터 보자. 비아냥에서 무시로, 그리고 당황과 검증 보도, 참회록으로 이어졌다. 초기에는 ‘가십거리’로 여기는 언론들이 많았다. 허핑턴포스트가 “트럼프의 선거유세는 구경거리”라며 트럼프 기사를 연예면에서 다루겠다고 밝힐 정도였다. 그러나 트럼프가 ‘좌절한 백인들’의 표심을 공략하는 데 성공하자 언론들은 당황했고, 심상치 않은 ‘트럼프 현상’ 분석에 나섰다. 본질적으로는 어려운 경제상황, 누적된 소외계층의 불만이 이런 현상의 원인이지만, 초기에 트럼프라는 인물을 ‘유명인’로 만들고 키워준 것은 언론과 대중 미디어였다는 ‘반성’도 나오기 시작했다.


그 중 백미는 얼마 전 미국의 미디어 ‘폴리티코’(Politico)에 실린 ‘한 트럼프 타블로이드 필경사의 참회록’(Confessions of a Trump Tabloid Scribe)이라는 글이었다. 부제(How New York’s gossip pages helped turn a lying real estate developer into a celebrity phenom)만 보아도 전체 내용이 짐작 가는, 한 언론인의 부끄러운 과거에 대한 고백이자 반성문이다.


필자는 1980년대 뉴욕의 타블로이드 신문 뉴욕포스트 기자를 지낸 수전 멀케이. 그녀는 이렇게 글을 시작했다.

“고백할 게 하나 있다. 나의 참회를 듣고 난 뒤 제발 나를 총으로 쏘지는 말아 달라. 내가 트럼프 신화를 만드는 데 일조했다. 정말 정말 죄송하다.(I am very, very sorry)”


1980년대에 타블로이드를 중심으로 한 언론들은 트럼프를 그저 엔터테이너로 여겼고, ‘장사’가 되는 소재인 그의 부동산 거래와 화려한 사생활, 괴상한 행동과 스캔들을 경쟁적으로 보도했다. 그때는 몰랐지만, 지나고 나서 보니 기자들이 그런 기사를 통해 트럼프를 ‘뉴욕의 아이콘’으로 만들고 있었다. 그런 그가 지금 대통령이 될지도 모르게 됐다는 것이 그녀의 반성이었다.


우리 언론들도 처음에는 트럼프의 대선 출마를 ‘해외토픽’ 거리로 여기는 듯 보였다. 물론 지금은 다르다. 트럼프 현상이 나타난 ‘미국의 변화’를 직시하라는 주문이 쏟아진다.


지난주에 ‘대권 주자’ 중 한 명으로 거론되는 정치인과 식사를 하며 이야기를 나눴다. ‘합리적’이라는 평을 받고 있는 그는 우리 언론이 흥미 위주의 기사를 많이 쓰는 것이 정치발전을 저해하고 있다는 말을 했다. 국회 상임위 모습이 TV 뉴스에 나올 때 공무원을 상대로 고함치는 의원이 보이면, 그건 준비해온 질문을 앞에서 다른 의원이 먼저 해버려서 질의거리가 떨어져서 그런 것이라고 보면 된다는 말도 했다. 그는 그런 의원들은 TV가 비춰주지 말아 달라고 강조했다. 신문도 어떻게든 주목을 받으려고 ‘튀는 행동’을 하는 정치인들은 그냥 무시해 버리고, 기사로 절대 쓰지 말아달라고 말했다. 정치인은 본인 사망 기사를 제외하면, 하다못해 그게 부정적인 주목(Negative attention)을 받는 것이라도, 자신이 기사화되는 것을 좋아한다는 말도 있지 않는가. 언론이 그런 정치인에게 이용당하지 않고, 또 언론도 ‘장사’가 되는 소재에 연연해하지 않는다면, 구태 정치인도 줄어들고 우리 정치도 건강해질 수 있을 것이다.


그와 이야기를 나누면서 문득 우리 언론도 ‘참회록’을 쓰는 모습을 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쓸거리야 많지 않은가. 대중의 관심을 끌기 위해서건, 보수 진보를 불문하고 ‘당파적 이익’을 위해서건, 부작용은 고려하지 않고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를 했던 케이스들이 좀 많았던가. “정말 정말 죄송하다”는 멀케이의 참회록을 본 미국 국민들이 언론에 대한 신뢰감을 버리지 않을 것 같아 보여서, 그게 부러워서 그런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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