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장이 멈추는 순간 ‘분열’과 ‘갈등’이 폭발한다. 세계경제를 ‘패닉’으로 몰아넣은 브렉시트(Brexit: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는 그 전조다. “EU를 떠나는 것은 미친 짓“이란 국제사회의 목소리는 “EU에 남아 있으면 점점 더 많은 비(非) 영국인이 삶터와 일자리를 점령할 것”이란 영국 국민의 피해의식에 묻혀버렸다.
세계의 성장 엔진이 급속히 식어가고 있다. ‘제로 성장’에 이어 디플레이션으로 대변되는 ‘역성장(degrowth)’을 걱정해야 할 정도다. 성장이 멈추면 ‘제로섬(zero-sum) 사회’가 된다. 제로섬 사회에서 한쪽의 이득은 누군가의 손해로 돌아온다. 따라서 분열과 갈등이 증폭된다. 역사가 이를 웅변하고 있다. 유럽 대부분은 18세기 산업혁명이 일어나기 전까지 500년 이상 제로 성장을 거듭했다. 유럽 중세가 국가 간 ‘정복’과 ‘굴복’, 계층 간 ‘수탈’과 ‘저항’의 역사로 점철된 주된 이유다.
2차 대전 이후 추진돼온 지구촌의 협력과 공조의 노력은 제로섬 사회를 앞두고 입지를 잃고 있다. “미국은 더 이상 세계 질서를 유지하는데 돈을 쓰지 말고 자국민을 위한 일을 해야 한다”는 도널드 트럼프가 미국 공화당 대선 후보로 부상한 것도 같은 맥락 위에 서 있다.
한국의 잠재성장률 추락 속도는 OECD 국가들 중 최고 수준이다. 이미 2%대에 진입했으며 향후 10년 안에 1%대까지 떨어질 것이란 분석이 나온다. 이에 따라 계층 간, 지역 간, 노사 간, 세대 간 갈등이 한꺼번에 분출될 위기를 맞고 있다. 최근 영남권 신공항 지정을 놓고 벌어진 지역 간 첨예한 갈등은 그 조짐일 뿐이다.
갈등은 곧 비용이다. 삼성경제연구소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갈등 정도는 OECD 27개국 중 종교 분쟁을 겪고 있는 터키에 이어 두 번째로 심각한 수준이다. 이로 인한 사회적 비용은 2010년 기준 연간 최대 246조원에 달한다. 반면 갈등 조정 능력은 최하위권이다. 한국의 갈등 조정과 해결 능력은 2011년 기준 OECD 34개국 중 27위에 그쳤다. 비즈니스 협상 전문가인 진 브렛 미국 노스웨스턴대 석좌교수가 실시한 ‘16개국 경영인 협상 스타일 조사’ 결과, 한국인은 가장 이기적인 태도로 협상에 임하는 것으로 나왔다. 상대방의 입장과 이익을 고려하지 않은 채 자신의 이익만을 추구하는 경향이 어느 나라보다 강하다는 것이다.
저명한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21세기 사회를 ‘위험(risk) 사회’로 정의하며 ‘협상형 국가’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그는 묵시론적으로 근대를 파국으로 가는 위험사회로 보고, 권위주의적으로 의사결정을 하는 정부를 대신해 교섭의 장을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협상능력을 가진 국가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그의 지적대로 갈등의 조정과 관리는 성장이 멈춘 사회의 중요한 ‘사회 안전망’으로 떠올랐다. 하지만 한국 사회는 상호간의 이익을 도모하는 협력적 의사 소통능력이나 조정·관리 인프라가 부실하다. 때문에 이해관계가 다를 경우 대화보다는 대립으로 갈등을 증폭시킨다. 사회갈등 관리를 위해 갈등관리기본법을 제정하고, 소송 대신 이해 당사자 간 조정과 중재를 통해 화해를 유도하는 대체적 분쟁해결제도(ADR)를 활성화하는 등 국가 차원의 ‘갈등 관리 인프라’ 구축이 시급한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