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기자의 소명이 무겁게 다가왔다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제3부:그래도 기자는 기자다 ④다시 현장에서<끝>

이진우 기자 | 2016.06.28 20:55:22

바이라인은 일종의 자부심, 명예로운 이름을 얻어야죠
오보, 두고두고 부끄러워, 부지런하면 어디서든 통해
감사의 메시지 받았을 때 가슴 한 켠이 뭉클했어요
말하지 않는 걸 말하는 게 제가 필드를 뛰는 이유죠


합격 발표 하루 전 떨어질 것 같았다. “괜찮아. 다시 하면 되지.” 신촌의 싼 방을 찾고 있는데 전화가 왔다. “축하합니다. 현호씨.” 그냥 크게 한 번 날숨을 내보냈다. 3개월 동안의 인턴, 절반은 떨어지는 과정에서 살아남았다는 안도감과 함께 앞으로 쉽지 않겠구나 하는 묘한 긴장감이 뒤엉켜 몰려왔다.


방송사 PD를 하다가 돌연 관두고 기자의 길을 택한 한현호 TBC 기자는 지난 2013년 합격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물론 매우 기뻤지만 첫 직장에서 합격했던 순간만큼 멋모르고 기쁘지만은 않았다. 그만큼 언론인이라는 책임감이 그에게 무겁게 다가왔기 때문이다.



적지 않은 나이에 하던 일을 관두고 언론인의 꿈을 이룬 기자는 또 있다. 홍한표 MBC강원영동 기자는 안정적인 직장인 생활을 하다가 충동적으로 사표를 냈다. 문득 사회에 공헌하는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에 곧바로 기자시험에 뛰어들었다. 홍 기자는 “합격 전화를 받고 한동안 멍한 기분 외에는 다른 기분이 들지 않았다”고 회상했다.


최훈민 매일신문 기자도 33살의 늦깎이로 수습을 맞이했다. 대학 졸업 후 곧바로 대기업에 입사했지만 사회생활의 부당함을 여러 차례 느낀 그였다. 최 기자는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지적하는 기자가 되겠다고 다짐, 회사를 박차고 나왔다. 그는 “생각보다 수험생활이 녹록지 않았다”며 “포기하는 심정이었는데 덜컥 합격해 정말 기뻤다”고 했다.

수차례 낙방 후 합격…바늘구멍을 뚫다
바늘구멍만큼이나 좁다는 언론고시에서 대부분의 기자들은 낙방이라는 쓴 아픔을 겪는다. 그만큼 기자들에게 합격의 순간은 그 어느 때보다 값지다.


지난 1988년 올림픽 이후 신문사들이 경쟁적으로 지면을 확장할 때의 일이다. 채용은 활발했지만 그만큼 지원자가 급증해 경쟁이 치열했다. 당시 면접에서 십여 차례 떨어진 경험이 있는 박기호 한국경제 기자는 합격 소식을 듣고 가슴을 쓸어내렸다. 박 기자는 합격의 순간을 ‘하늘을 나는 기분’으로 표현했다.


IMF 이후 일자리가 부족하던 때 기자를 꿈꾼 박록삼 서울신문 기자도 합격의 순간을 생생히 기억한다. 박 기자는 소수의 언론사만 신규 채용하던 시절 번번이 낙방을 거듭하다 다음해인 1999년 대한매일(현 서울신문)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가고 싶은 언론사 중 한 곳이라 기쁨이 더 컸다”며 “80년 경향신문에서 해직된 아버지가 유독 기뻐하셨다”고 했다.

기사에 달린 이름, 기자의 생명 ‘바이라인’
바늘구멍을 뚫고 들어온 기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순간은 또 있다. 처음으로 내 이름을 달고 기사가 나간 때이다. 기자들에게 바이라인은 이름, 생명과도 같다. 첫 바이라인의 순간에 얽힌 이야기도 다채롭다. 대부분 수습 딱지를 달고 한 보도이기 때문에 지금 보면 민망하고 부끄럽기도 하다.



“수습기자에게 경찰관의 거친 응대는 일상이지만 제가 있는 곳은 워낙 악명이 높았어요. 노크만 해도 역정을 낼 정도였으니 수습들의 발길이 드물었죠. 수차례의 무시와 고성에도 매일 들러서 꾸준히 인사했어요. 결국 최근에 해결한 사건에 대해 듣게 됐죠. ‘기자는 엉덩이가 무거워서는 안 된다’는 것을 몸소 배운 날이었습니다.”(김구연 CBS 기자)


“지난해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됐던 크림빵 뺑소니 기사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임신한 아내를 위해 크림빵을 사들고 길을 건너다 뺑소니를 당해 숨진 남편에 대한 기사였죠. 단순한 사고 기사를 넘어 그 안에 있는 이야기를 담고 싶었고 결국 조기에 범인을 잡을 수 있었어요. 사회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것 같아 보람 됐죠.”(신정훈 충청일보 기자)

첫 바이라인, 평생의 교훈으로 남다
처음 자신의 이름을 달고 나간 기사는 뜻 깊다. 대개 수습 때 발굴한 기사는 간단한 스트레이트로 대단한 특종이 아닌 경우가 많지만, 이들에게는 평생의 교훈으로 남는다.


“바이라인은 일종의 자부심으로 보면 돼요. 책임감 있는 보도를 할 수 있게 만드는 중요한 장치란 거죠. 바이라인 덕분에 시청자나 독자들이 믿고 보는 거라 생각합니다. 엉망으로 쓰면 부끄러운 이름이 되는 거고 잘 쓰면 명예로운 이름을 얻는 거죠.”(강나루 KBS 기자)


“영등포 세모자 살인사건 기억하시죠? 정신질환을 앓던 장남이 어머니와 남동생을 살해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이었죠. 현장으로 투입됐고 6시간을 대기하다 새벽 2시쯤 몰래 피가 흥건한 집안으로 들어가 휴대폰 불빛에 의지하며 취재를 했어요. ‘현장에 있는 기자만큼 이 사건을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없구나’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 순간이에요.”(송영훈 CBS 기자)

피하고 싶은 순간…“물을 먹다”
기자들은 급박하게 돌아가는 사건을 챙기는 와중에 실수를 저지르기도 하고, 타사 기자에게 기사를 뺏기기도 하며, 선배에게 거짓말을 해 혼나는 경우도 적지 않다. 특히 기자라면 한번쯤 물먹는 경험을 피할 수 없다. 이러한 과정을 거치며 기자는 한 단계 성숙한다.


홍수민 중앙일보 기자는 배우 박시후가 성폭행 혐의를 받고 떠들썩할 무렵, 경찰서 현장 취재를 나갔다. 마음 놓고 점심 먹으러 나간 사이, 박시후가 조사를 받으러 경찰서로 들어온 걸 뒤늦게 알게 됐다. 타사 기자는 이를 놓치지 않았다. 배달 음식이 들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경찰서 옆에서 계속 지켜보고 있었고, 결국 단독을 터뜨렸다. 홍 기자는 “보기 좋게 한방 먹었다”이라며 “기자로서 나 자신을 되돌아보게 된 순간”이라고 회상했다.


기자들은 다음날 조간을 보고 ‘물을 먹었는지’ ‘놓친 건 없는지’ 재차 확인한다. 때때로 타사에 뺏겼다 싶으면 취재원에게 연락해서 서운함을 토로하기도 한다. 김동욱 한국일보 기자는 취재원에게 ‘왜 먼저 통신사에게 알려줬냐’고 따진 적이 있다. 하지만 취재원의 한마디는 김 기자의 정곡을 찔렀다.



“해당 기자가 한 달 전부터 이슈를 챙기는데 취재원으로서 감동 받아 정보를 알려줬다는 거였죠. 순간 부끄럽더라고요. 전 요령만 늘 참이었는데 부지런하면 어디서든 통한다는 진리를 깨치게 됐죠.”

기자의 숙명, 팩트 확인과 취재 윤리
아무리 유능한 기자여도 낯 뜨거울 때는 누구나 있다. 마감을 앞두고 촌각을 다투는 시점에 크로스체크를 건너뛰고 오보를 내기도 한다. 특종 과욕에서 불거지는 일이다.


이승환 경남도민일보 기자는 “사실관계부터 어긋난 오보를 한 적이 있다. 이른바 ‘이야기가 되겠는데’라는 함정에 빠지게 된 것”이라며 “두고두고 부끄러웠다. 어떤 성과 앞에서도 흥분하지 않는 굴레를 평생 안고 살 생각”이라고 전했다.


속보 경쟁에 내몰리는 기자들은 자괴감을 느끼기도 한다. 나주석 아시아경제 기자는 “확인하지 못한 사실을 속보로 쓰는 경우가 있다”며 “일을 하면서 매 순간이 선택이고 고민의 시점이라는 걸 느끼게 된다. 잘한 선택을 한 건지는 항상 의문”이라고 했다.


황석하 부산일보 기자도 “다른 사람에게 전해들은 것을 확인과정을 거치지 않고 내보냈는데, 나중에 당사자에게 전화가 왔다. 마감시간에 쫓겨 그냥 쓴 건 데 항의를 들으니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며 “이런 실수는 두 번 다시 해선 안 되겠다고 다짐했다”고 밝혔다.


지난 2000년 시사저널에 입사해 현재 시사인 편집국장을 맡고 있는 고제규 기자는 기자로서의 윤리 의식을 그 누구보다 강조한다. 간단해 보이는 취재원들의 접대 유혹도 마땅히 뿌리쳐야 한다는 것이다.


고 기자는 수습 시절 첫 바이라인으로 스케이트보드 개발자를 만나 인터뷰한 기사를 내보냈다. 당시 인라인 스케이트와 같은 기념품을 선배가 무의식적으로 차에 넣어줘 받아왔는데 이게 화근이 됐다. 선배들이 기자 윤리를 지키지 않았다며 고 기자를 크게 혼낸 것. 그는 “첫 바이라인 기사로서도 기억이 남지만 평생 기자생활하면서 지켜야 하는 윤리의식이 확실하게 각인됐다”고 전했다.

펜과 마이크로 세상을 바꾸다
술과 야근의 연속, 육체적·정신적 스트레스에도 끈을 놓지 않는 기자들. 사표를 안고도 다시 필드를 힘차게 뛰는 기자들. 이들에게 기자는 무엇이고 왜 기자여야만 하는 것일까.


강민구 연합뉴스TV 기자는 지난해 10월 남북이산가족 상봉행사에 취재를 갔을 때 일을 떠올렸다. 강 기자는 60년 만에 떨어져 살았던 가족들을 만나는 어르신들과 작은 인연을 맺었다. “눈물의 일주일이었어요. 역사의 현장에 있었다는 거창함을 아니더라도, 누군가의 깊은 인연을 전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값진 무언가를 얻게 됐습니다.”



기자들은 말한다. 기자는 펜과 마이크 하나로 세상을 바꿀 수 있다고. 사회적 약자에게 오늘보다 내일이 더 행복한 환경을 만들어주고 싶다고 입을 모은다.


“기자생활 초반 안양에 거주한 장애 여성분이 있었는데 거동이 불편하고 도와줄 만한 사람이 주변에 없었어요. 기사가 나간 뒤 주변의 도움이 이어졌죠. 해당 복지사가 감사의 메시지를 보내왔는데 ‘아 이래서 기자를 하는 거구나’하고 뭉클하더라고요.”(송한진 MBN 기자)


“태국에서 한인 위안부 포로명부를 발굴해 보도한 게 기억나요. 당시 피해자 가족을 취재해서 위안부 피해자 인정을 받도록 해드렸죠. ‘기자는 이런 일을 할 수 있구나’라는 사실에 벅찼고, 누군가의 한 많은 삶을 발굴한 작업이라 개인적으로 느낀 점이 많았던 때에요”(노윤정 KBS 기자)


“주류 언론사만큼의 처우나 기자의 권익을 누리지 못하면서도 일하는 이유는 하나에요. 사회에서 말하지 않는 걸 말하고 그 과정에서 사회가 인식하고 또 나아가 제도가 개선되는 걸 목격하는 과정이 나의 가장 큰 보람이죠. 제가 필드를 다시 뛰는 이유이기도 해요.”(옥기원 민중의소리 기자)

더 나은 세상을 위해 ‘다시 현장으로’
지난 2014년 교장이 여교사를 성추행한 사건으로 전국이 들썩였다. 당시 기자가 된 지 갓 한 달된 새내기 기자가 특종을 터뜨렸다. 교장은 곧바로 해임됐다. 권소영 대구CBS 기자는 그때 일을 생생히 기억한다. 권 기자는 “펜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는 걸 실감했다”며 “진행과정을 계속 지켜보고 감시 역할을 하면서 내 스스로도 성장하는 계기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권 기자의 보도가 나가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사건은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덮어졌을 것이다. 어쩌면 제2의 피해자가 나타났을 지도 모른다. 권 기자가 던진 돌이 우물에 파장을 일으켜 세상을 변화시킨 셈이다. 기자들이 지금 이 시간에도 고된 현장 속에서 펜을 들고 뛰는 이유가 아닐까.

이진우 기자 jw85@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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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즈를 마치며…>

“왜 기자가 됐는지 자문해 봅니다”
기자 130명의 고민·열정·희망의 사연


당대의 기자와 기자사회를 정면으로 마주하겠다면서 시작한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시리즈가 종착역에 이르렀다. 기자협회보 취재팀은 지난 6개월 동안 130여명의 기자를 취재하면서 그들의 고민과 열정, 희망의 사연을 들었다.


수습 4주차 기자는 “우리 사회에 긍정적인 변화를 줄 수 있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소망했고 3년차 정치부 기자는 “기자의 길이 맞는 것일까”를 되물었으며 7년차 기자는 “기자와 직장인 사이에서 고민한다”고 고백했다. 한 데스크는 종일 모니터와 씨름하면서도 “좋은 뉴스를 포기할 수 없다”고 힘주어 말했다. 정년퇴직 후 재입사한 67세의 노기자는 새벽 5시30분에 일과를 시작해 밤 11시가 돼야 노트북을 덮었다.


3부 14편이 이어진 시리즈에서 취재팀은 언론계를 지배하는 고질적 문제들을 목도했다. 일상화된 징계·해고는 기자의 소명을 버리도록 강요했다. 한 기자는 거듭된 징계를 “감옥 생활”이라고 했다. 과로와 스트레스는 기자의 육체와 정신을 야금야금 갉아먹고, 권력의 악의적 소송은 물리적·심리적 압박을 가중시키며, 수익 우선은 기자가 지향하는 가치를 뒷전으로 밀어내고, 미래에 대한 불안과 상명하복의 조직문화는 언론계를 떠나게 만들었다.



기자직에 대한 최소한의 자부심도 갖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이 있기에 덜 절망적이다. 취재팀이 만난 기자들은 권력에 맞서기 위해 호주머니에 사표를 넣고 다녔고, 디지털 시대를 온몸으로 떠안거나 뉴스의 바다에서 전문성을 갈고 닦으며 독자와 교감했다. “고맙다”는 말에 지친 몸을 추스르고, 왜 기자가 됐는지 되물으며, 세상이 나아지는데 작은 기여를 했을 때 보람을 느낀다고 했다.


치열한 노력에도 기자들을 바라보는 눈길은 싸늘하다. 냉소적 시선에는 기자들이 우리 사회의 요구에 제대로 응답하지 못하고 있다는 질책이 깔려 있다.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수리하다 숨진 한 19세 비정규직 노동자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지 못했고, 가습기 살균제로 인한 죽음의 행렬과 피해자 가족들의 처절한 슬픔에 수년간 눈감았다. 그러면서 정치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목매고, 선정적 보도에 하이에나처럼 달려들고, 속보경쟁에 매달리며 오보를 내고 또 냈다. 기자들이 우리 사회 아프고 소외된 구석을 얼마나 이해하고 공감해왔는지 묻지 않을 수 없는 까닭이다.


그럼에도 취재팀은 반성과 성찰을 거듭하며 인간적인 사회를 만들기 위해 현장을 지키는 기자들에게 희망을 봤다. ‘기자는 무엇으로 사는가’ 시리즈를 마치며 한 수습기자의 말을 떠올린다. “현장에서 부딪치면서 어떤 기자가 돼야 하는지, 더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는지 생각해요.”

김성후 기자 kshoo@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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