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보복, KBS 어쩌다 이렇게 됐나

[우리의 주장] 편집위원회

한국사회의 자정능력이 심각하게 깨졌음을 확인하는 상징적 사건이 이어진 한 주였다. 시민사회를 위한 법 집행이라는 무거운 책임을 가진 검사장은 기업체들에게 경제적 편익을 받고 법을 ‘팔아넘겼다가’ 구속됐다. 집권당의 유력인사는 조폭마냥 대통령의 뜻을 들먹이며 총선에 영향을 행사한 사실이 폭로됐다. 그리고 공영방송 KBS는 청와대의 보도개입에 침묵하는 행태를 기자협회보를 통해 실명 비판한 정연욱 기자를 제주총국으로 발령하는 보복인사를 단행했다.


말하자면 한국은 지금 ‘카르텔 지배사회’와 다르지 않다. 삼권분립 민주정치에서 권력을 위임받은 이들이 사익을 챙기기 위해 전횡을 부리고 있다. 이는 돈 좀 더 벌겠다며 모두가 마시는 식수를 만들 상수원에 폐수를 몰래 버리고, 그린벨트 지역의 삼림을 마구잡이로 베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 카르텔과 한 몸이 되기로 작심한 언론의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사회의 정의와 공익을 위한 ‘감시견’으로 일해야 하는 언론은 지금 카르텔이 더 많은 이익을 착취할 수 있도록 봉사하고 있다.


국민으로부터 수신료를 지원받는 KBS가 공공의 안전 문제인 세월호 사건을 정면으로 다뤄야 할 시점에 대통령 심기가 불편하다는 청와대 인사의 ‘압력’에 물러서고,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THAAD·사드) 한반도 배치에 대한 비판적 목소리를 ‘보도통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짖어야 할 때 짖지 않는 개는 더이상 감시견이 될 수 없다. 목소리를 내야 할 때 목소리를 냈다는 이유로 기자에게 인사보복을 하는 조직은 더이상 언론사라고 하기 어렵다.


우리는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것인가. ‘기자는 기도하는 사람’이라는 변상욱 CBS 대기자의 말을 기억해본다. 입사시험에 통과하고, 수습 꼬리표를 뗀다고 해서 저절로 기자가 되지는 않는다. 차장이나 부장이 된다고 해서 저절로 데스크의 능력을 갖추는 것은 아니다. 언론사의 사장이 된다고 해서 저절로 올바른 저널리즘의 수호자가 되는 것도 아니다. 기자는 매일같이 자신이 당연하게 여겨왔던 믿음과 지식을 의심하고, 숨겨진 답을 찾기 위해 지식과 정보를 찾아다니며, 사람과 세상을 진지하게 탐구하는 사람이다. 기자는 단순히 월급쟁이가 아니다. 기자는 소명이다. 칼같은 언어로 세상을 면밀하게 다루는 이다.


하지만 취재원들에게 접대받으면서 호형호제하고, 권력을 가진 이들과 친분을 쌓으며 스스로 권력자가 되려는 기회주의적 폴리널리스트들이 언론계에 득세하면서 소명은 갈수록 희미해졌다. 주요뉴스의 간판앵커가 청와대 대변인 자리로 직행했다가 국회의원이 되어도 부끄러움을 모르는 시대가 되었다. 1997년 경제위기 이후 ‘부자되세요’라는 질척한 배금주의 구호가 한국사회를 물들일 때 언론도 그 영향을 비껴가지 못했다. 나라는 개인의 성공이 사회에는 어떤 의미인지, 나의 성공으로 사회가 더 나은 곳이 될 수 있는지에 대해 성찰하기를 그친 것이다.


이같은 흐름을 막지 못할 경우 언론은 ‘내부 식민지화’가 가속화되고 있는 이 나라에서 착취의 기만적 프로파간다를 확산시키는 선전도구로 더더욱 전락하고 말 것이다. 감시견이 짖어야 할 때 짖지 않는다면 더 이상 ‘마을 사람’들은 개를 믿지 않게 될 것이다. 세계정세가 격변기에 접어들고, 동아시아 외교와 경제에서 한국의 입지가 갈수록 줄어드는 이 위중한 시국에 언론은 언제까지 기만적인 내부단속에 열을 올릴 것인가.


언론인들은 스스로 재갈 물리기에 저항함으로써 이같은 위기를 벗어나야 한다. 동아일보 대규모 해직사태 41년 만에, 언론은 또다시 기로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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