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히 52년 전 오늘, 한국기자협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박정희 정권이 언론 통제를 위해 강권했던 ‘언론윤리위원회’라는 기구 대신, 기자들 스스로 언론 자유를 수호하고 각자의 권익을 지키기 위한 자율적 결사체로서 ‘한국기자협회’를 결성한 것이다.
‘언론윤리위원회’란 무엇이었나? 공안과 국가안보, 국가원수의 명예와 관련된 사항 등에 대해 각 언론사의 보도를 심의하고 규제할 수 있도록 한 기구였다. 그리고 이 기구의 구성에는 국가가 깊이 개입할 수 있었다. 당시 선배 기자들은 물론 신문 편집인과 발행인까지도 이 법을 ‘언론악법’으로 규정하고 철폐 투쟁에 나섰던 이유다. 그 투쟁에 한국기자협회가 앞장섰고, 결국 정권은 언론윤리위원회법을 철회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한국기자협회의 창립기념일을 맞이해 52년 전의 역사를 뿌듯하게만 되돌아보기엔 오늘날의 현실이 참으로 엄혹하다. 상상해본다. 현 정권이 2016년 판 ‘언론윤리위원회’를 추진한다면 우리는 다시금 52년 전 그때처럼 저항할 수 있을 것인가? 선뜻 긍정하기 어렵다. 그리고 좀 더 비극적인 상상은, 지금의 정권은 그러한 법제를 추진할 필요성 자체를 느끼지 못할 지도 모른다는 것이겠다. 굳이 직접적으로 통제하지 않더라도, 공영방송을 위시한 다수 언론이 이미 ‘알아서 자발적으로’ 정권의 이해관계를 반영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상황이 이렇게 되기까지 기자들의 저항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총파업, 해고, 징계, 좌천…. 서슬 퍼런 언어들이 수년 간 동료들을 휩쓸고 지나갔다. 그 결과 여전히 14명의 ‘해직기자’가 일터로 돌아가지 못하고 있으며, 적극적으로 저항했던 기자들 역시 뉴스룸에서, 취재현장에서 추방되고 있다. 이렇듯 반복적인 저항의 실패, 그리고 지속적인 배제와 추방, 격리를 목도한 다수 기자들은 ‘생존’을 위해 몸을 움츠리고 있다. 그렇게 위로부터 강제된 ‘예외상태’는, 점점 아래로부터의 순응과 복종의 축적 속에 점차 ‘규칙화’되어가고 있다.
미디어 업계를 강타한 시장적 변화 역시 기자들을 계속해서 위축시키고 있다. 이런저런 혁신과 변화의 시도에도, 근본적으로 ‘뉴스’를 상품으로 여기지 않는 소비자들의 인식은 점점 굳건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더 이상 ‘편집’에 봉사하는 경영은 존재할 수도 기대할 수도 없게 된다. 오히려 이제 ‘편집’은 경영을 위해 동원될 것을 요구받고 있는 현실이다. 극한의 ‘생존’ 위기에 내몰린 기자들에게는 언론 자유라는 기본적인 요구조차 사치처럼 느껴지기에 이른 상황인 것이다.
그래서다. 오늘날의 기자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 것인가? 참으로 암담한 질문일 수밖에 없다. 섣불리 희망을 얘기할 수도, 각자가 처한 맥락을 간과한 채 다짜고짜 ‘초심을 회복하라’는 윤리적 요구만 강제할 수도 없다. 다만 어떤 상황에서도 분명한 것은, 故 송건호 선생의 말처럼 ‘언론이 옳은 길을 가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기자들의 책임이 크다’는 사실이다. 언론의 정치·정권종속성, 경제종속성이라는 문제는 정치인도, 자본가도, 대중도 해결해줄 수 없는 것이다.
결국은 기자들 스스로 중심을 잡아야 한다. 각자의 직업윤리에 충실하며 기능인이 아닌 전문인으로서 취재·편집의 독립과 자유를 지켜야 한다. 기자로서 살아가기가 아무리 팍팍하더라도 최소한 그러한 마음만큼은 내려놓지 말아야 한다. 사회의 공기(公器)인 언론사의 종사자들에게 있어 ‘생존’의 가치가 아무리 급할지언정, ‘옳음’이라는 가치는 ‘포기해도 될 무언가’가 되어서는 결코 안 되겠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