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펜이 칼보다 강하다’는 경구를 인용하지만 반대로 “펜으로 싸우는 자, 칼로 죽는다”는 말도 있다. 이 말은 알제리의 회교원리주의 지도자 ‘아부압둘 라만 아민’이 이슬람 원리주의에 입각한 국가 통제와 통치에 따르지 않는 언론들에게 날린 경고이다. 물론 이 두 개의 경구는 꽤 오래 전에 등장한 이야기이다. 그렇다면 21세기 이 나라의 기자들은 권력에 저항하다 칼로 죽을까?
오늘 우리 저널리즘의 현실에서는 “자유가 자유를 몰수하는 자유주의의 변증법”이 펼쳐지고 있다. 언론사주나 경영진이 권력에 밀착해 긴밀한 관계를 맺고 수구적 행태를 보이면서 언론은 시장의 자유를 얻고 언론사주와 경영진은 내부 인사와 정책결정의 자유를 극대화했다. 그 결과 기자는 취재현장에서 내쫓기고 광고영업으로 내몰렸고 일부는 해고당해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먼저 올해 국정감사를 앞두고 전국언론노조가 감사 의제로 제시한 내용을 살펴보자. △언론장악 진상규명 청문회 △공영방송 지배구조 개선 △노조탄압 언론사주 퇴출 등 무너진 저널리즘의 본령을 되찾고자 하는 절박함이 담겨 있다.
기자협회보를 펼쳐 제목만 읽어도 그 광경이 한 눈에 들어온다.
“언론사 포럼 참가하려면 300만원…이익 챙기기 수단 전락”
“MBC, 노조와의 소송에 20억원 지출”
“상식 외면한 부당해고·대기발령에 법원·지방노동청이 제동”
“누가 이용마 기자를 암에 걸리게 했나”라는 안타까운 기사도 눈에 띈다. 노조의 정당한 파업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증거 없이 해고당한 MBC 최승호 PD, 박성제 기자, 지난해 11월 민중총궐기 보도의 공정성에 대해 문제를 제기했다는 이유로 부당징계를 당한 정홍규 KBS 기자, 2014년 전국언론노조에 가입한 이후 지부장이 해고당하고 노조 집행부에 5억5000만원 손해배상 가압류가 걸려버린 대전일보 기자들…. 모두 권력자의 칼에 당한 것이 아니라 권력의 시종으로 전락한 자들의 채찍에 당한 셈이다.
욕망으로 변질된 경영진에게 저항하면 해고당하고, 해고의 쓰라림을 견디다 암에 걸리고, 투쟁하지 않으면 손발 묶인 피고용인이 되고…. 이것이 오늘 우리 저널리스트의 실상이다. 이 나라에서 “펜으로 싸우는 자”들은 “권력의 칼에 의해 죽는 명예”조차 허용되지 않는다. 권력의 칼이 날아오기 전 충성스런 경영진의 징계·해고에 잘려 나가고 소송에 묶이고 화병을 얻어 쓰러진다.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이 나라 언론의 자유는 언론사의 자유이자 언론사주·경영진의 자유로 변질된 지 오래다. 언론의 자유 뿐 아니라 목표마저도 이윤추구 및 그들의 자리보전과 다음 자리 보장으로 왜곡돼 버렸다. 언론노조가 비를 맞으며 나눠주던 팸플릿에는 공영방송 사장이 “사드 배치를 다룬 KBS 뉴스해설이 중국 관영매체의 주장과 다름없다. 안보에 있어서 다른 목소리가 있어서는 안 된다”고 핏발 세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런 발언은 공영방송의 목표가 정부(Goverment)에 있는지, 국가(Nation)에 있는지, 조국과 민족(My Country)에 있는지 구분해 고민한 적도 없는 발언이다. 이런 경영진이 공영방송의 주인이 대통령인지 시청자인지 시민인지 제대로 고민해 봤을 리 없다. 그렇게 해서 자리를 보전하고 호의호식하면 정말 보람찬 생일까?
언론이 시민의 수치로 전락했던 것이 오늘 우리만의 문제는 아니었을 것이다. 시공간을 넘어 100년 전 미국의 비평가 업턴 싱클레어가 언론인들을 향해 퍼부었던 독설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그다지 무리한 이야기가 아니다.
“그 뻔뻔스럽게 모은 돈이 당신들의 봉급 봉투에 들어 있다. 여러분의 수치에 대한 보상이다. 진실의 실체를 시장에 판 당신, 시민의 희망을 더럽게 팔아치운 당신….”
우리는 그렇게 살고 싶지 않다. 그래서 죽어야 한다면 차라리 칼에 죽고 싶다. 기자답게 명예롭게 그렇게 죽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