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건현장 뛰는 24년차 '늙은 오빠'

사건기자 자원한 안영춘 한겨레 기자

“진심으로 쓴 거니, 장난삼아 쓴 거니.”


처음은 아니었다. 십수년 전에도 그랬다. 시경 캡이 끝나고 온라인뉴스부를 가겠다는 그에게 편집국장은 방으로 불러 “나한테 불만 있으면 말하라”고 했다. 불만 있는 게 아니었다. 2000년 오마이뉴스의 탄생을 보며 스트레이트와는 다른 스타일의 기사, 능동적인 속보 대처가 부러웠을 뿐이었다. 그는 생긴 지 6개월밖에 되지 않은 온라인뉴스부에 저널리즘의 미래가 있을 거라 생각했다.


무엇보다 새로운 것을 해보고 싶은 욕망이 강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인사 나기 전날 밤, 진심이냐는 편집국장의 물음에 안영춘 한겨레 기자는 단호한 목소리로 답했다.


“누가 소원수리를 장난으로 씁니까?”



24년차 기자는 그렇게 중부 라인을 담당하는 사건기자가 됐다. 중부서, 남대문서, 용산서가 출입처였다. 하지만 초년병 시절과는 달리 그는 물샐 틈 없이 출입처를 막는 것보다 출입처를 거점으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녔다.


“출입처 개념이 계속 약화되고 있는데 그 최전선이 사건기자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오히려 저널리즘을 재구성하거나 새로운 실험을 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도 이곳이라고 생각했죠. 인위적인 탐사보도팀보다 사건의 이면에 있는 것들을 개인 혹은 팀 단위로 유연하게 결합해 취재하는 시스템이 있다면 좋지 않을까, 그걸 위해 경험 많은 기자들이 현장에 배치되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의 결기와는 다르게 주위의 반응은 당혹과 혼란의 연속이었다. 무엇보다 취재원들이 부담스러워했다. 출입처 후배도, 경찰도 그랬다. 심지어 40대 후반의 세월호 특조위 홍보팀장은 최근에야 그를 처음 봤을 때 매우 당황하고 긴장했노라고 고백해왔다.


안 기자 스스로도 헤매고 있었다. “노쇠한” 몸으로 노트북 등 무거운 취재 집기를 이고 서울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니는 것은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삐삐보다 더 방정맞게 울려대는 카카오톡 단체방 알림도 낯설기만 했다.

 

“광화문에서 열린 환경시민단체 기자회견을 간 적이 있는데 다른 기자들은 전부 바닥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더라고요. 수첩에 적고 추가 취재를 하고 카페로 가서 보고를 올리려고 하는데 이미 기사 몇 개가 검색되는 것을 보며 세상이 많이 변했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반면 잊고 지낸 현장에 돌아왔다는 것은 큰 기쁨이었다.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졌다. 어디에나 기사가 있었고, 누구하고나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동네 미장원에 가서도 더 이상 꾸벅꾸벅 졸지 않고 미용사와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누게 됐다.


“사건기자가 되니 상당히 많은 것이 바뀌었어요. 이제 분개하는 것을 직접 취재해서 쓰죠. 세월의 더께가 앉았던 몸을 때 타월로 벗겨낸 느낌입니다.”


지난 11일에는 온라인에 ‘오빠가 돌아왔다’는 제목의 ‘늙은 경찰기자의 일기’도 연재하기 시작했다. 시경 캡을 비롯해 후배들이 권유한 덕분이다.


“회사에서 구체적이면서도 막연한 기대가 있는 것 같습니다. 얼마나 사건기자를 할지는 모르겠지만 새로운 모델을 완성시켜야 하지 않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과거의 사건들을 회고하는 회고 저널리즘이나 아주 작은 티끌에서 우주를 보여주는 기사에 도전하는 등 현장기자가 해야 할 몫에 충실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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