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가 둘이고 입이 하나인 건 말하기보다 듣기를 두 배로 하라는 뜻이라 한다. 취재원들의 말문을 열어야 하는 의무를 띈 기자로서는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할 말임에도, 듣는 여유를 갖지 못하고 질문을 쏟아내기 바쁜 날이 있다. 물론 추임새를 넣을 기회조차 주지 않고 계속 말을 쏟기 바쁜 취재원을 앞에 두고 적잖이 당황할 때도 있다. 그러나 대부분은 역시 ‘듣기’가 부족한 나의 탓이라 여겨본다.
최근 귀를 두 배, 세 배로 열고도 모자랄 만큼 듣기에 열중하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깜짝 놀랄만큼 솔직한 화법이지만 그 안에서 진실함과 진중함을 만나게 되면 말의 형식들은 그저 껍데기에 불과하다는 걸 다시금 느끼게 된다. 구색 갖춘 연설문보단, ‘진짜’를 찾고 싶은 시대, 일흔의 현역 ‘윤여정’ 배우와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뉴스를 통해 다 전할 수 없었던 인터뷰이의 ‘촌철살인’, 50년 한 길을 걸어온 그녀의 이야기다.
“긴 인생을 가면서 산도 만나고 계곡도 만나고 그렇듯이 배우의 커리어 동안에도 산 정상이 있는가 하면 내리막길이 있고 그래요. 근데 내리막길이 왔을 때 버텨서 살아남는 것, 그게 좀 힘든 일이죠. 난 운이 좋다, 살아 남았다, 애썼다 생각했어요.”
그녀가 언급한 ‘산 정상’이 언제인지는 묻지 않았지만, 김기영 감독의 1971년작 ‘화녀’가 아닐까. 윤여정 배우와 인터뷰를 앞두고 꼭 보리라 다짐했던 그 영화, 어렵게 구한 영상 속에서 낯설지만 익숙한 눈빛을 만났다. 극 중 동식을 위협하는 스물 넷 신인 여배우의 무게는 데뷔작이라 믿기 어려울 만큼 광기로 가득했고 강렬했다. 데뷔작 한편이 그녀를 ‘명배우’ 반열로 올려놓고도 남았으니, ‘내리막길’의 시작은 어느 정도 예견할 수 있었으리라.
그러나 지난 50년, 그녀는 ‘별 걸 다하는’ 배우 그 자체의 삶을 살며 한 길만을 걸었다. ‘돈의 맛’에서의 늦바람이 난 시어머니, ‘여배우들’ 속 까칠한 여배우부터 최근작 ‘죽여주는 여자’ 속 박카스 할머니까지, 맡아온 캐릭터들은 하나같이 ‘센케’(센 캐릭터의 줄임말) 중에서도 대장급이었다. 우리 사회에 늘 있지만, 왠지 불편하게 포장되어온 인간 군상을 그녀는 온 몸으로 표현해냈고, 대체 불가능한 여배우로서의 오늘을 살며, 끊임없이 관객들을 사로잡았다.
“오늘이, 나도 처음이잖아요. 내일은 또 처음이고, 우리도 실수하고 여러분하고 똑같이 실수하고, 그리고 내일은 좀 잘해야지 그래야지 그러는데 살다보니까 똑같은 일은 안와요. 다른 일이 와요. 그러면 또 실수해요.”
50주년인지, 51년인지도 헷갈리니 세월 따지는 게 창피하다는 그녀는 내게 ‘실수’를 인정하며 살라고 말했다. 내일에 대한 두려움과 기대감, 그 중 전자의 무게가 커질 찰나엔 언제나 도망치고 싶을 때가 많은 직업을 가진 내 고민을 알고 있다는 듯 말이다. 실수로 점철된 시간들이 내일의 또 다른 ‘실수하는 나’를 조금 더 반갑게 맞이한다면 오늘 조금 더 기쁘지 않을까.
“이 세상에 나는 하나밖에 없잖아요 그래서 나는 나답게 살고, 나답게 일하고, 그러는 게 좋지. 인생은 제가 살아보니까 뜻대로 안되더라고. 계획대로 안되고, 그래서 맹세하지 말자 그랬어요. 그래서, 아무튼. 오늘을 살고 또 내일 살아 있으면 내일 일을 할 거고 그렇게 생각했어요. 60 넘어서부터는 그렇게 생각했어요.”
그녀는 지난 달 열린 부산국제영화제에서 누구보다 많은 팬들을 몰고 다닌 스타였다. 익히 알려져 있는 그녀의 직설 화법이지만 귀를 크게 열고 그녀의 무심한 한마디를 듣고 싶어하는 젊은이들이 몰려들었다. 실수를 인정하면서, 그렇게 오늘 그저 하루를 살아내면 되는 것이라고 무심하게 말하는 일흔의 그녀, 빛이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