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대통령이 ‘최순실 게이트’로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녹화방송은 생방송으로 바뀌었고, 1분40초에서 9분3초로 시간이 길어졌다. 허나 본인의 심경만을 쏟아내고 끝난 것만큼은 변함이 없었다. 담화문에는 2선 후퇴 요구에 대한 생각이나 새누리당 탈당 여부 등 각종 사안들에 대한 대통령의 입장은 전혀 담기지 않았다. 국민들이 궁금해하는 수십 가지 의혹은 해소되지 못한 반성문에 불과했다. 청와대 출입기자들은 있는 그대로 받아쓰고 전달하는 앵무새 같았다. 기자로서의 가장 기본적인 사명인 ‘알 권리’는 철저하게 외면하고 침묵했다.
청와대측에서 “대통령이 사과하는 담화인 만큼 질의응답이 없는 걸 양해해달라”고 요청했다고 해명할지 모르겠다. 그렇지만 지금은 비상시국이다. 비선실세 최순실씨가 대통령 연설문뿐 아니라 온갖 국정에 개입한 정황들이 포착되고 있다. 정호성 전 청와대 부속비서관의 통화녹음 파일과 안종범 전 청와대 정책조정수석의 다이어리 등을 통해 대통령이 직접 기업을 압박해 재단 모금에 나섰다는 의혹까지 제기된다. 국민들을 대신해 그 자리에 앉아있던 게 기자들이라면 응당 돌발질문이 나왔어야 했다.
발언을 마치고 돌연 연단에서 내려온 순간은 압권이다. 대통령이 취재진에게 다가오자 오히려 기자들은 움찔하거나 쭈뼛쭈뼛 일어서려 할 뿐이었다. 어떻게 각종 논란과 의혹들에 대해 단 한 마디 질문도 꺼내지 못했는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청와대 관계자 같은 제3자를 통하지 않은, 대통령 있는 그대로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기회를 우리 모두는 날려버렸다.
어느 기자회견 자리건 가장 핵심은 질의응답 시간이다. 묻고 답하는 소통과정이 없다면 기자들은 들러리만 서는 관중에 그칠 뿐이다. 국민들의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기자의 당연한 책무이자 존재의 이유다. 또 대통령 주변에는 듣기 좋은 첨언만 하는 이들로 넘쳐나기 때문에 제3의 외부 시각을 전달하는 역할을 기자들이 해야 한다.
많은 선후배 기자들도 대통령이 일방적으로 자기 할말만 하는 작금의 사태를 성토했다. 한 언론인은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 “이런 정국에 대통령한테 질문한다고 청와대 관계자들이 물리적으로 막기까지야 하겠는가”라고 한탄했다. 또 다른 언론인은 “막내 기자들의 탐사 보도로 기자를 ‘기레기’에서 건져내고 있었는데, 가장 잘 나가는 선배인 청와대 기자들이 기자로 탈바꿈할 수 있는 천운을 걷어 차버렸다”고 토로했다.
그나마 이번 최순실 게이트에서 젊은 기자들과 TV조선, JTBC 등 종편의 활약으로 불신을 약간이나마 해소하며 언론을 다시 보게 되는 계기가 됐다. 대다수 언론사 인터넷사이트 트래픽이 2배 이상 늘었을 정도다. 특히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이 검찰에 출두했을 때 찍힌 사진 한 장은 백 마디 글보다 임팩트가 강했다. 가족회사 관련 질문을 받자 기자를 매섭게 노려봤고, 검찰 조사를 받으면서는 팔짱을 끼고 웃는 모습이 사진에 담겼다. 국민들이 분개하고 변화를 외치게 만든 힘이 언론에서 나왔다.
지금까지 박근혜 대통령의 독선과 불통을 막지 못한 건 언론도 책임이 크다. 청와대 출입기자단 시스템은 질문 여부와 내용을 항상 청와대와 사전 조율해 진행했다. 정해진 시나리오대로만 질문하고 보충질문도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언론의 자유를 외치고 공정 보도를 할 수 있겠는가. 권력을 감시하는 역할이 가능한가. 청와대 기자들은 언제까지 들러리만 설 텐가. 내가 이러려고 기자를 했나 하는 자괴감이라도 드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