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언론, 대선 예측 실패 반성문

정확도 떨어지는 여론조사 의존
평범한 미국인들 목소리 못들어
세상변화 흐름 그대로 보여줘야

도널드 트럼프의 대통령 당선으로 미국 언론은 체면을 구겼다. 일찌감치 힐러리 클린턴 지지 의사를 밝힌 뉴욕타임스가 선거 직전 보도한 ‘클린턴 승리 가능성 84%’는 결국 오보가 됐다. 클린턴의 당선 전망을 98%로 예측했던 허핑턴포스트나 워싱턴포스트, NBC 등도 마찬가지였다.


클린턴 당선을 점쳤던 미국 언론은 잇따라 반성문을 냈다. 뉴욕타임스와 워싱턴포스트는 트럼프 지지자들의 이야기를 더 많이 들었어야 했다고 잘못을 인정했다. 리즈 스페이드 뉴욕타임스 퍼블릭 에디터는 선거 다음날인 9일 칼럼에서 “뉴욕타임스가 한정된 의제가 아니라, 평범한 미국인들 목소리에 귀 기울였더라면 미국 대선 결과는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라는 독자의 비판을 전했다.


미국 언론의 클린턴 승리 예측이 근거 없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거의 모든 여론조사에서 클린턴은 지지율 선두를 놓치지 않았다. 미국 여론조사는 1948년 대선 이후 당선자 예측에 크게 실패한 적 없을 만큼 높은 신뢰도를 자랑했다. 언론이 여론조사에 기댈만한 이유는 충분했다.


예측은 왜 빗나갔을까. 이준웅 서울대 언론정보학과 교수는 ‘회피하는 보수주의자 효과’를 원인으로 지목했다. 이 교수는 “보수 지지자들이 정치적 수치심 때문에 자신의 의견을 숨겼다가 투표에 참여한 것”이라며 “브렉시트도 같은 맥락이다. 우리나라 선거에서는 꾸준히 나타나는 현상”이라고 말했다.


여론조사보다 언론의 잘못이 더 크다는 지적이 있었다. 김선호 한국언론진흥재단 선임연구위원은 “선거 직전 두 후보는 오차범위 내에서 박빙이었다”며 “언론이 여론조사 결과를 해석하면서 지지율 차를 대수롭지 않게 여긴 게 패착”이라고 했다.


선거 이틀 전 미국 정치전문 매체 리얼클리어폴리틱스가 ABC, NBC, 이코노미스트, 폭스 등 주류 언론이 내놓은 여론조사를 취합한 결과를 보면 클린턴은 트럼프에 평균 2.2% 앞서고 있었다. 여기엔 트럼프가 4% 우위에 있다는 LA타임스 여론조사도 포함됐다.


김 선임연구위원은 “결정적 문제는 클린턴이 토론회에서 이겼다고 평가하면서 마치 실제로 당선된 것처럼 보도한 것”이라며 “엎치락뒤치락하는 판세에서 언론이 성급하게 클린턴 승리를 단언한 게 유권자의 선택에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고 분석했다.


언론이 전통적 역할에 충실했다가 함정에 빠졌다는 의견도 제기됐다. 강정수 미디어 액셀러레이터 메디아티 대표는 “언론은 트럼프의 극단적 발언을 팩트체크하며 쫓아가기 바빴다”며 “오히려 트럼프 지지자들을 열광하게 만들었다”고 말했다.


이번 대선 과정에서 드러난 미국 언론의 실수와 오류는 우리 언론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거물 정치인 발언과 여론조사 중심의 보도행태를 벗어나야 한다는 얘기다. 한 일간지 정치부 기자는 “지난 총선, 브렉시트, 미국 대선을 거치면서 기존 여론조사로는 민심을 제대로 반영하기 어렵다는 걸 느꼈다”며 “하지만 기사를 쓸 수밖에 없다. 여론조사 수치에 독자의 관심이 쏠리기 때문”이라고 했다.


언론사와 여론전문가가 힘을 합쳐야 조사의 정확도를 높일 수 있다고 이준웅 교수는 제언했다. 이 교수는 “숨은 표가 어디 있는지, 누가 과도하게 혹은 너무 작게 의견을 말하는지 파악하는 데 투자해야 한다”며 “단순히 머릿수만 세는 여론조사가 아니라 연구조사를 통해 데이터저널리즘을 실현할 수 있다”고 강조했다.


강정수 대표는 현장에서 ‘회피하는 보수주의자’를 만나야 한다고 조언했다. 강 대표는 “다른 언론이 힐러리에 집중할 때 WNYC(뉴욕공영라디오방송)는 트럼프 지지자를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본 인터뷰를 연재했다”며 “그들은 우파 괴짜에 열광한 게 아니라 트럼프가 자신의 이익을 대변해줄 것이라 믿었다”고 설명했다. 그러면서 “세상이 변화하는 흐름을 그대로 보여줘야 한다는 게 언론이 트럼프 승리에서 얻어야 할 교훈”이라고 했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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