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최순실 게이트, 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

워터게이트-박근혜 게이트, 기자들 취재로 시작 공통점
언론 보도로 드러난 진실에 소문·비방이라며 닮은꼴 부정
의회·검찰 조사 고삐 죄어오자 대통령 사람들 하나둘 입 열어
탄핵절차 착수하자 닉슨 사임, 탄핵 심판 대비하는 박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미국 역사상 유일하게 임기를 채우지 못한 대통령이다. 그는 1972년 워터게이트 불법침입 사건을 시작으로 대대적인 선거첩보활동과 방해공작이 밝혀져 결국 사임했다. 워터게이트 사건이 일어난 지 2년 뒤에, 그것도 미국 상원에서 탄핵안 승인이 확실시 되자 유죄를 선고받지 않기 위해 자기 발로 나간 것이었다. 2016년 박근혜-최순실 게이트에서도 워터게이트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미르·K스포츠재단 의혹으로 촉발된 게이트는 이후 전 방위적인 국정농단 의혹으로 번졌다. 다른 점은 탄핵을 앞두고 박 대통령은 하야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아주 작은 사건에서 시작된 거대한 공작, 사건 진행 내내 이어지는 대통령의 관련성 부인과 거짓말, 그러나 결국 언론의 치밀한 보도로 드러나는 진실 등은 워터게이트와 박근혜-최순실 게이트가 많은 부분 닮아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기자협회보는 이 두 게이트가 얼마나 닮아있는지 세밀하게 살펴봤다.

불법도청과 미르·K스포츠 재단
# 1972년 6월17일 오전 2시30분. 카메라와 도청 장치를 가진 다섯 명의 남자가 워터게이트 빌딩에 있는 민주당 전국위원회 본부를 침입했다. 이들은 ‘은밀한’ 목적을 지닌 ‘전문적인 불법침입’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워싱턴포스트의 밥 우드워드와 칼 번스타인은 이상한 낌새를 느꼈다. 피의자 중 한 명인 제임스 매코드는 대통령재선위원회의 경호주임이었고, 체포된 사람들의 수첩에는 하워드 헌트라는 이름, ‘W.H’라는 작은 암호가 적혀 있었다. 헌트는 백악관 자문관이었던 CIA 출신이었다. 두 기자는 재선위원회 변호사였고 백악관 전직 보좌관이었던 고든 리디도 피의자들과 여러 차례 통화한 사실을 알아내 이를 보도했다. 6월22일 닉슨 대통령은 “백악관이 이 특수한 사건에 관여하지 않았다”고 공식 입장을 발표했다. 


불법침입 사건 피의자들에게 흘러간 돈은 의혹의 핵심이었다. 워싱턴포스트를 비롯해 뉴욕타임스 등 언론들은 자금 출처를 찾느라 혈안이 돼 있었다. 번스타인과 우드워드는 재선위원회 직원의 전화번호 사본을 손에 넣어 저녁에 직원들의 집을 방문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전직 백악관 직원들이 도청 사실을 사전에 알고 있었다는 것, 돈은 재선위원회의 선거운동자금에서 나왔다는 것, 그 돈의 출처를 추적할 수 없도록 멕시코 수표로 자금 고리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아냈다. 그러나 대배심은 배후에 대한 근본적인 문제에는 손도 대지 못한 채 헌트, 리디, 다섯 남자를 기소하는 데 그쳤다.


# 2015년 10월27일과 2016년 1월13일. 한국에는 미르재단과 K스포츠재단이 설립됐다. 각각 19개 대기업에서 486억원, 288억원을 모금한 재단이었다. TV조선과 한겨레는 이 두 재단이 권력의 ‘은밀한’ 부분과 닿아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TV조선은 제 발로 찾아온 최순실씨의 측근 고영태씨에 의해, 한겨레는 한 취재원의 ‘우병우가 아닌 미르재단이 본질’이라는 말에 의해서였다.


TV조선은 2015년 1월 최씨의 측근 고영태씨에게서 ‘샘플실’ 영상과 ‘최순실이 짠 문화융성 사업과 예산’ 자료 등을 확보해 전체 밑그림을 그리고 보도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한겨레도 TF를 구성해 최씨와 정동춘 K스포츠재단 이사장의 관계부터 훑으며 보도를 준비했다. 7월26일 TV조선은 청와대 안종범 수석이 미르재단의 500억원 모금을 지원했다며 청와대와의 관련성을 보도했고, 9월20일 한겨레는 두 재단 설립에 최씨가 개입한 정황을 폭로했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은 정부·여당 눈치를 살피며 두 재단 의혹과 관련, 최씨와 안종범 수석을 고발한 사건을 형사8부에 배당했다.

번지는 불길
# 1972년 9월28일 밤. 우드워드와 번스타인은 도청 외에도 다른 방식의 선거공작이 있었다는 제보를 받는다. 자신의 친구가 매우 이례적인 방식으로 닉슨의 선거운동을 부탁받았다는 것이었다. 여러 명의 제보자와 딥스로트를 통해 두 기자는 50여명이 백악관과 재선위원회에서 백악관의 지시대로 선거 첩보활동과 방해공작을 한 것을 알아냈다. 도청, 미행, 신문에 제공한 가짜 정보, 가짜 편지, 선거 집회의 고의적인 취소, 선거운동원의 사생활 조사, 첩보원 배치, 문서 탈취, 시위에 선동꾼 잠입시키기 등이 그것이었다. 워싱턴포스트의 이 보도는 미국 가맹지 220개 중 절반 이상이 인용했고 그 중 몇몇은 1면에 게재했다. 백악관에서는 이 기사에 대한 논평을 29번이나 거부했다.


이 무렵 두 기자는 워터게이트의 첩보활동에 사용된 자금이 전 법무장관이자 닉슨 대통령 선거운동의 전 책임자인 존 미첼의 핵심 보좌관 몇몇에 의해 관리되었으며, 다른 방식의 선거공작에도 대통령의 개인변호사인 허버트 캄바치가 돈을 제공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워싱턴포스트가 이 내용을 보도하자 백악관은 반격했다. 대변인은 소문, 비방, 날조라고 폄하했고 재선위원회 위원장은 워싱턴포스트가 민주당의 선거 공작은 보도하지 않는다며 이중 잣대라고 비난했다. 워싱턴포스트의 편집주간인 벤자민 브래들리는 두 기자에게 사생활을 조심하라고 일렀다.


10월19일, 두 기자는 여러 방면의 취재를 통해 대통령 비서실장인 홀더먼도 자금을 관리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는 대통령의 주요 대리인이었다. 두 기자는 홀더먼의 기사를 썼지만 출처가 틀려 백악관으로부터 엄청난 반격을 받았다. 백악관은 이후 대통령 관저의 사교 행사 취재에서 포스트를 제외시켰고 플로리다 주에 있는 2개의 TV방송국에 대한 워싱턴포스트의 소유권 관련 도전장이 연방통신위원회(FCC)에 제출되기도 했다.


# 한국에서도 미르와 K스포츠재단 의혹이 최순실과 그의 측근들로 번지기 시작했다. 최씨의 딸 정유라씨의 이화여대 입학 및 학사 특혜 의혹이 제기됐고 10월 초에는 전 창조경제추진단장이자 ‘문화계 황태자’로 불린 차은택씨가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았다. 청와대는 이 시기 “일방적인 추측성 기사여서 언급할 가치가 없다” “비상시국에 비방과 폭로성 발언이 난무한다”며 보도들을 일축했다.


10월24일 JTBC는 최씨가 이용한 것으로 추정되는 태블릿PC를 입수해 최씨가 대통령 연설문을 사전 열람했다는 내용의 뉴스를 보도했다. 이 문건 유출 의혹은 엄청난 파장을 불러 일으켜 박 대통령은 다음날 “일부 연설문과 홍보물 표현 등에서 도움을 받은 적이 있다”며 대국민사과를 해야 했다. 손석희 사장은 이날 보도국 기자들에게 “겸손하고 자중하자”는 메일을 보냈다.


한편 이번 게이트에서 언론 탄압 정황도 불거졌다. TV조선이 입수해 보도한 고(故) 김영한 전 청와대 정무수석의 비망록에 따르면 지난 2014년 7월, 박 대통령은 직접 언론에 대해 “본때를 보여야 한다. 열성과 근성으로 발본색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또 김기춘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은 한술 더 떠 “비판 언론에는 고소·고발 등 철저하게 불이익을 주고, 호의적인 보도에는 금전적 지원을 하라”는 말까지 했다.

드러나는 진실
# 1973년 2월5일. 샘 어빈이 워터게이트 침입 사건 등의 혐의를 조사하기 위해 대통령 선거 활동에 관한 상원 특별조사위원회에 50만 달러의 예산을 배정하는 결의안을 제출했다. 결의안은 77대0의 만장일치로 통과했다.


이 무렵 대통령의 사람들은 서서히 진실을 폭로하기 시작했다. 2월 말 대통령이 상원에 임명동의안을 제출한 패트릭 그레이 FBI 국장 내정자는 청문회에서 대통령 법률고문에게 수사 자료를 건넸다고 자발적으로 말했다. 또 캄바치가 선거 첩보활동과 방해공작에 돈을 제공했다고 폭로했다. 워터게이트 범인들도 입을 열기 시작했다. 3월28일 범인 중 한 명은 재선위원회가 처음에는 도청공작에, 지금은 은폐공작을 위해 자신들에게 직접 돈을 지불하고 있다고 증언했다. 닉슨은 4월17일 성명을 발표했다. 이 자리에서 그는 “이 사건으로 기소된 사람은 행정관료든 정부의 누구든 정직될 것”이라고 표명했다.


# 한국에서는 이원종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해 안종범 정책조정수석, 우병우 민정수석, ‘문고리 3인방’으로 불리는 이재만 총무비서관, 정호성 제1부속실비서관, 안봉근 국정홍보비서관 등의 사표가 수리됐다. 10월27일에는 이영렬 서울중앙지검장을 본부장으로 하는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 특별수사본부가 구성됐다. 특별수사본부는 문체부 사무실, 미르·K스포츠재단 관계자 등의 주거지 등을 압수수색했고, 이 시기 최씨도 독일에서 귀국해 검찰에 출석했다. 게이트 관련자들 대부분도 검찰에서 조사를 받았다.


박 대통령의 사람들도 서서히 진실을 폭로했다. 안종범 전 수석은 미르·K스포츠재단 강제 기금 모금 의혹에 대해 대통령의 지시를 받아 했던 것일 뿐이라고 시인했고, 조원동 전 청와대 경제수석도 박 대통령이 이미경 CJ 부회장의 퇴진을 지시했다고 검찰에 진술했다.

대통령의 개입
# 1973년 4월 말. 대통령의 특별고문인 찰스 콜슨이 지난 12월 대통령에게 일부 대통령의 측근이 워터게이트 사건과 빼도 박도 못할 관계에 있고 조직적인 은폐공작이 진행되고 있다는 사실을 경고했다고 폭로했다. 그는 적어도 세 차례에 걸쳐 대통령에게 워터게이트 사건에 관계했던 몇몇 사람을 해임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일로 대통령의 측근들은 모두 사임하거나 해임됐다. 대통령은 전 국민 TV연설을 통해 “모든 책임은 바로 이 자리에 있다. 나는 대통령직의 더 큰 의무에 이제 다시 최선을 다해야 한다”고 말했다.


7월14일 대통령의 보좌관인 알렉산더 버터필드가 모든 것을 얘기했다. 집무실 대화 내용이 녹음돼 있고, 대화 중에는 도청사건을 꾸민 내용이 포함돼 있다는 것이다. 특검과 의회는 이 테이프를 공개하라고 요구했고 닉슨은 이를 요구하던 특검을 해임했다. 비난이 빗발치자 결국 닉슨은 12월 테이프를 제출했지만 몇몇 부분은 삭제된 채였다. 이듬해인 1974년 7월 미국 하원은 탄핵안을 의결했다. 닉슨은 상원에서 탄핵안 승인이 확실시 되자 그해 8월8일 사임했다.


# 11월20일, 최씨 국정농단 사건을 수사한 검찰 특별수사본부는 최씨와 안종범 전 수석, 정호성 전 비서관과 공모관계가 인정되는 부분에 대해 인지 절차를 거쳐 박 대통령을 피의자로 정식 형사 입건했다고 밝혔다. 헌정 사상 처음으로 현직 대통령이 입건된 것이다. 검찰은 최씨와 안 전 수석, 정 전 비서관을 구속 기소하면서 모두 7개 범죄사실에서 박 대통령이 공모관계에 있다고 밝혔다. 특히 박 대통령을 ‘공범’으로 표현해 주된 역할을 한 피의자 신분임을 분명히 했다.


박 대통령은 11월29일 3차 대국민담화를 통해 “단 한순간도 사익을 추구하지 않았고, 작은 사심도 품지 않고 살아왔다”면서 “대통령직 임기 단축을 포함한 진퇴 문제를 국회의 결정에 맡기겠다”고 밝혔다. 그러나 민심이 심상치 않자 12월9일 국회는 박 대통령을 탄핵했다.

※이 기사는 「워터게이트-모두가 대통령의 사람들(밥 우드워드, 칼 번스타인 지음, 양상모 옮김)」을 참고했습니다.

강아영 기자 sbsm@journalist.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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