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지펀드 공세강화에 국민연금 제 역할 할 때다’, ‘커지는 국민연금 백기사 역할론’, ‘국민연금, 투기자본 편에 서면 안 된다’, ‘미·일서 사냥 끝낸 헤지펀드 이제는 한국서 먹잇감 노려’, ‘투기자본 놀이터 된 한국, 경영권 승계기업 집중 표적’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의 합병 논란이 뜨겁던 지난 2015년 주요 매체의 기사와 사설 제목이다. 경제지를 비롯한 대다수 언론은 합병안을 반대한 글로벌 헤지펀드 ‘엘리엇매니지먼트’를 단기 수익에만 집착하는 ‘하이에나’로 규정했다. 삼성물산 지분 11.21%를 보유해 캐스팅보트를 쥐었던 국민연금공단에 대해서는 투기자본에 맞서 글로벌 기업을 지켜야 한다는 ‘국익론’을 앞세워 찬성표를 던져야 한다는 여론을 조성했다. 언론은 이미 답을 정해 놓고 삼성의 논리를 대변하는 나팔수 역할에만 충실했다.
이 같은 여론에 힘입어 합병 안건은 주주총회에서 통과됐다. 삼성은 합법적인 경영권 승계에 성공했다. 하지만 ‘박근혜-최순실 게이트’를 수사하는 박영수 특별검사팀은 삼성의 합병 과정에 대통령의 지시가 있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문형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은 외압을 행사했다는 혐의로 구속 기소됐다. 대통령과 삼성의 부당거래에 국민연금의 독립성과 공공성이라는 원칙은 무너졌다. 감시자 역할을 외면한 언론은 불합리한 결정에 힘만 실어준 꼴이 되고 말았다.
애초 국민연금의 합병 찬성까지는 갸우뚱하게 만드는 과정이 많았다. 국민연금 기금운용본부는 찬성으로 이끌기 위해 의결권행사 전문위원회를 거치지 않고 투자위원회에서 결정했다. 투자위원회 위원 3명도 합병 건 논의 직전 교체했다. 결과를 위해 의사결정 시스템이 망가져버렸다. 국민연금은 적정성 논란이 컸던 합병비율(제일모직 1: 삼성물산 0.35)에 대해서도 애초 1:0.46이 바람직하다는 판단을 가졌으나, 명백한 손실을 덮기 위해 합병 시너지라는 막연한 미래가치를 끌어들였다. 그 결과는 3000억원 규모의 국민 노후자금 손실로 돌아왔다. 백기사 역할만을 외치며 이를 방기한 언론도 책임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지난 2016년, 국민들은 광화문 촛불로 정치권력을 끌어내렸다. 언론도 끈질긴 탐사보도로 대한민국의 저널리즘을 재평가받게 했다. 하지만 경제권력에 대해서는 삼성공화국이라는 표현이 유행처럼 쓰였던 10년 전과 달라진 게 없다. 기업에 비판적인 기사는 속된 말로 ‘킬’되거나 사라지기 일쑤며 홍보성 자료를 받아쓰는 데 급급한 기자도 허다하다.
보수·경제지들은 이번 특검 수사 보도에서도 어김없이 ‘경제가 어려운데 경영권 공백으로 인사·투자 올스톱 우려’ 등 기업이 피해자라는 식의 편들기 기사를 쏟아내고 있다. 오히려 글로벌 기업인 구속시키겠다는 특검, 불도저 특검, 짜맞추기 결론 내나 식으로 특검을 몰아붙이는 모습이다.
특히 미르·K-스포츠재단 불법모금은 대한민국 사회의 병폐인 정경유착의 민낯이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이 박근혜 대통령과의 독대 후 삼성은 대기업 중 가장 많은 204억원을 출연했다. 다른 재벌들의 경우 총수의 사면과 신규 면세점 선정 특혜까지 얽혀 있다. 권력의 주체는 자본이 아니다. 언론은 자본에 대한 종속에서 벗어나야 한다. 특검이 밝힌 대로 “국가 경제 등에 미치는 사안도 중요하지만 정의를 세우는 일이 더욱 중요하다”는 명백한 진리를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언론의 반성을 거듭 촉구하며, 지나친 광고 의존도로 인해 상실해버린 경제권력에 대한 비판기능을 되찾길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