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순을 넘기신 할머니와 함께 산다. 가족들 모두 출근한 시간, 할머니의 ‘동무’는 텔레비전이다. 방송국으로 매일 출퇴근하는 나로선, 언젠가부터 집에서만큼은 TV를 일부러 켜지 않는 습관이 생겨버렸는데, 할머니는 내 리포트가 나오는 아주 잠깐도 놓치지 않으실 정도다. TV로 만나는 많고 많은 이야기들, 눈살 찌푸리게 하는 소식들이 많다지만 할머니에겐 반갑고 소중한 큰 세상 그 자체일 것이다.
그런 할머니와 함께 앉아 TV를 처음 본 게 언제였을까. 까마득한 기억을 되짚어보니, 대여섯 살 때 주일 예배를 마치고 집에 돌아와 동생과 출출한 배를 부여잡고 있을 때 즈음, 경쾌한 실로폰 소리를 흉내 내던 그때인 것 같다. “딩동댕동~, 전국~ 노래자랑!” 뒤이은 반주소리에 몸을 흔들면서 음식을 입에 넣고 오물거리면, 할머니께선 가만히 앉아서 먹으라고 핀잔을 주곤 하셨다.
동그란 얼굴에 동그란 안경, 감히 ‘귀엽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푸근한 미소의 진행자. 전국 곳곳 별별 출연자들의 사연들에 기막히게 응수하는 입담이 더해지니, 꼬마입장에선 트로트 음악은 지루해도 송해 선생님 멘트 시간 기다리다보면 한 시간이 금방 지나갔던 기억이다. 평소 호랑이 같으셨던 할아버지조차 무릎을 탁 치면서 ‘아유, 저 사람 참’ 하셨던 그 시간, 할아버지의 미소를 볼 수 있었던 흔치 않았던 순간으로 기억된다. 나뿐만 아니라 많은 이들의 기억 속에 ‘전국노래자랑’은 이런 소소한 추억이 아련함과 뒤섞인 어린시절 그 자체일 것이다.
어릴 적 그 ‘재미난 할아버지’ 송해 선생님을 수십 년이 지나 통일과 관련한 뉴스 인터뷰이로 만나뵙게 됐다. 젊은 시절 평양서 몇 년 간 지내신 적 있는 할머니는 가끔 ‘그 사람 북에서 온 사람 아닌가’ 하시며 반가워하곤 하셨다. 같은 연배, 비슷한 추억을 가진 우리 할머니 이야기를 꺼냈다. “그래? 할머님! 힘내십시오, 우리 오래오래 살아서 통일 봅시다!” 또렷하고 힘찬 목소리로 카메라 앞에서 옛 이야기를 풀어내기 시작하셨다.
사실상 우리 근현대사와 궤를 같이하며 평생을 보내온 그다. 황해도 재령서 태어나 북한서 순회공연을 한 젊은 시절, 월남한 뒤 군에서도 위문공연을 하다 방송과 인연을 맺게 됐다. 환갑이 지나 잡게 된 노래프로그램 마이크를 놓지 않은 게 벌써 30년. 어떤 사연도 술술 풀어가는 예능계의 거목이지만, 고향 이야기엔 눈물을 멈추지 못했다. 남으로 피난 오면서 인생이 ‘망망대해 위에 떠있는 것 같다’는 생각에 ‘송해’라는 예명을 붙였다고 하니, 파란만장한 세월 속에 감춰둔 그리움은 시간도 지울 수는 없으리라.
단순히 ‘그 때 그 시절’ 진행자가 아닌, 현재 진행형 최고의 방송인이다. 여든 이후에 시작한 새로운 도전들은 지금 이 시대의 모든 세대가 그를 응원하고, 사랑하는 큰 이유 중 하나다. 젊은 배우, 아이돌과 어울려 프로그램을 진행하고, 드라마나 영화에도 깜짝 등장해 열연을 펼친다. 젊은 시절 꿈을 이루기 위한 가수로의 도전, ‘대부 포스’로 등장한 잡지 화보, 랩퍼로 변신한 광고까지…. 거목의 위엄이 아닌, 전 국민의 송해로 함께 한다.
그의 이름이 포털사이트 검색어에만 올라도 모두의 가슴이 철렁하는 건, 수십 년 세월 속 나의 이야기가 그 이름 안에도 담겨 있어서 일거다. 한 자리를 묵묵히 지키는 그 이상으로, 계속되는 도전이 이어지는 송해 선생님의 삶. 매일 TV를 통해 세상을 만나시는 할머니가 오래도록 그를 보게 되길 기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