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시만 기다리세요.” 조승원 MBC 기자가 인터뷰 도중 벌떡 일어났다. “색다르게 맥주 먹는 법을 알려드릴게요.” 5분쯤 후, 그의 손엔 캔 맥주와 토마토주스가 담긴 비닐봉지가 들려 있었다. “카페만 아니면 멋있게 섞을 텐데...” 아쉬워한 그가 맥주와 토마토주스를 1:1로 섞어 내밀었다. 칵테일 ‘레드아이’였다. “어때요?” “달고 맛있어요.” 다행이라는 듯 그는 맛없는 와인이나 샴페인을 어떻게 재활용할 수 있는지 얘기를 이어나갔다. “와인에는 오렌지주스와 석류시럽, 사이다를 넣고, 샴페인엔 각설탕에다 비터 한 방울을 넣으면...”
조승원 기자는 자칭 ‘미주가’다. ‘미주가’는 그가 만든 단어로, 맛있는 음식을 찾아다니는 ‘미식가’처럼 매력적인 술을 쫓아다니는 사람이다. 그가 ‘미주가’가 된 역사는 길다. 1997년 그가 MBC에 입사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가보면 당시 기자들은 일명 ‘텐텐주’를 먹었다. 양주잔에 양주를 가득 따르고 그 잔이 담긴 맥주잔에 맥주도 가득 따르는 무지막지한 술이었다. 그 술을 그는 매 자리마다 20잔씩 넘겼다. 맛보다는 취하기 위해 마시는 술이었다.
그러다 2000년대 중반쯤 슬슬 그 문화가 지겨워진 조 기자는 와인 등 여러 술을 접해보고 그러다 공부도 하고 또 그러다 집에서 칵테일까지 만들다 본격적으로 술의 세계에 발을 디뎠다. 2010년 국가 공인 주류 자격증인 조주기능사를 취득하고 주류 교육 기관인 조니워커 스쿨을 수료하는 등 자타공인 ‘술박사’가 됐다. 최근엔 팝-록 뮤지션의 술 이야기를 다룬 책, <열정적 위로, 우아한 탐닉>을 냈다. 원체 팝-록 음악 애호가이기도 한지라 팝 스타들의 음악과 그들이 사랑한 술 이야기를 책에 녹여냈다.
하지만 책의 근원엔 고 신해철씨가 있다. 이 책의 아이디어를 신해철씨가 줬기 때문이다. 2004년 11월 당시 시사매거진 2580에서 ‘대마초는 마약이다?’를 주제로 아이템을 준비하던 조 기자는 인터뷰 섭외 차 신해철씨를 찾아가게 된다. 그리고 그는 특별한 경험을 한다. 죽이 잘 맞아 밤새 신해철씨와 대마초, 음악, 술에 관해 얘기를 나눈 것이다. 동이 트고 대화가 끝난 뒤 신해철씨는 이렇게 말했다. “우리 둘이서 한 얘기, 언제 시간 되면 책으로 써봐.”
그 뒤 바쁜 기자 생활 탓에 까맣게 잊고 있었던 그 약속은 MBC가 파업에 들어가고 조 기자가 비제작부서로 발령 나면서 상기됐다. 그는 2012년부터 본격적으로 자료 조사에 들어갔다. 한 해를 꼬박 바친 "무식한" 자료 조사였다. 2013년부터는 글을 썼다. 1년 만에 절반 이상이 완성되는 등 순탄한 흐름이었다. 하지만 2014년 세월호 참사가 터졌다. 당시 MBC 기자협회장이었던 그는 펜을 놓을 수밖에 없었다. ‘언론인인 나는 무엇을 하고 있나’하는 자괴감이 밀려들어 도저히 책을 쓸 수 없었다.
그런데 6개월이 흐른 2014년 10월27일, 집필을 재개할 수밖에 없는 사건이 터진다. ‘마왕’ 신해철이 세상을 떠난 것이다. 조 기자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를 악물고 다시 책을 쓰기 시작했다. 결국 2년 후 책이 나왔다. “출판사에서 책을 택배로 보내줬는데 실물을 보니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고요. 해철이 형과의 약속, 또 여러모로 힘들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서 그런가.” 책이 나온 뒤 그는 위스키 ‘화이트호스’ 한 병을 들고 추모공원에 갔다. 검은 옷 입은 마왕이 백마를 타고 하늘을 날아다니라는 의미에서였다.
“너무 늦게 나와서 미안하다고 술 한 잔 따라드렸죠. 형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쓴 책이니까 인세 전액은 ‘신해철’의 이름으로 인디 뮤지션 등 예술인에게 전액 기부하기로 했고요. 20일 만에 1쇄 2000부가 모두 팔렸는데 그만큼 기부할 수 있으니 다행입니다. 한편으론 이 책은 어찌 보면 자신을 위로하기 위해 쓴 책이었어요. 요즘 힘든 시기잖아요. 읽는 분들이 술안주처럼 가볍게 읽으면서 여유를 찾는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 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