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언론과의 전쟁’에서 회심의 일격을 가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백악관 출입 기자를 상대로 한 일일 브리핑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어버리기로 했다. 그는 한때 브리핑제도 폐지 방침을 밝혔다가 언론계와 정치권의 거센 반발로 인해 한 발 물러섰었다. 트럼프는 일일 브리핑제도를 없애는 대신 브리핑 횟수와 시간을 줄이고, 생중계 또는 녹화와 녹음 기회를 대폭 제한하는 전략을 동원했다.
CNN의 선임 백악관 출입기자인 짐 아코스타는 “우리가 서서히, 확실하게 이 나라에서 ‘뉴노멀’의 세계로 끌려들어 가고 있다”고 주장했다. 아코스타 기자는 “이 나라에서 대통령이 어려운 질문에 대한 답변을 회피한 채 자신을 격리시키는 게 가능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트럼프의 백악관이 브리핑제도를 무력화하려고 동원한 수단이 ‘프레스 개글(press gaggle)’이다. 백악관에서 브리핑룸은 원칙적으로 모든 언론에 개방돼 있다. 백악관에 정식으로 등록돼 있지 않은 기자도 사전에 대변인실에 연락하면 브리핑에 참석할 수 있다. 숀 스파이서 백악관 대변인이 나서는 이 브리핑은 ‘온 카메라’ ‘온 레코드’ 원칙이 적용된다. CNN 등 24시간 케이블 뉴스 방송은 이 브리핑을 생중계한다. 특히 말도 많고, 탈도 많은 트럼프 대통령 취임 이후 백악관 브리핑 생중계 방송은 인기 만점의 ‘정치 드라마’이다. SNL 등 유명 코미디 프로그램이 이 브리핑을 패러디해서 톡톡히 재미를 봤다.
프레스 개글은 공식 브리핑과 달리 생중계하거나 텔레비전 카메라로 녹화하지 않는 게 불문율이다. 그렇지만 오디오 녹음은 가능하고, 녹취록이 공개되기 마련이다. 스파이서 대변인은 프레스 개글을 녹화는 물론이고, 녹음도 하지 못하도록 제한했다. CNN이 프레스 개글을 비디오 없이 오디오로 생중계하자 스파이서 대변인이 오디오 녹음까지 차단했다.
미국에서 프레스 개글은 백악관이 언론과 소통해온 유용한 창구였다. 백악관 대변인이나 고위 당국자가 출입 기자를 상대로 특정 현안에 관해 심도 있게 설명할 필요가 있을 때에 프레스 개글을 한다. 개글은 공개된 브리핑룸이 아니라 대변인실이나 백악관 참모 방에서 이뤄진다. 이 때문에 비좁은 장소를 이유로 소수의 기자만을 부르거나 풀 기자를 선정해 개글을 한다. 대통령이 에어포스 원을 타고 이동하면서 수행 기자를 상대로 대화를 나눌 때에도 풀 기자를 대상으로 개글을 한다.
브리핑과 개글의 중간 형태인 ‘확대 개글(expanded gaggle)’도 있다. 확대 개글은 각 언론사별로 1명씩만 참석하도록 인원이 제한된다.
트럼프의 백악관은 확대 개글의 불문율도 깼다. 각사 1인씩 참석하되 어느 언론사에 참석 기회를 줄지 대변인실이 일방적으로 결정해 해당 언론사에 통보하고 있다. 이는 백악관 기자단의 자율 운영 전통을 무시한 조치이다. 지난 16일 스파이서 대변인 방에서 실시된 확대 개글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이 싫어하는 유력 언론사가 대거 배제됐다. 보스턴 글로브에 따르면 확대 개글에 뉴욕 타임스(NYT), CNN, BBC, 로스 엔젤레스 타임스 (LAT), 폴리티코 등이 참석하지 못했다. 트럼프는 입만 열면 NYT와 CNN을 ‘가짜 뉴스’라고 공격하고 있다. 워싱턴 포스트(WP) 기자는 그날 백악관에 오지 않았다. 확대 개글에 초대받은 언론사는 폭스 뉴스, NBC, ABC, 월스트리트 저널(WSJ), 워싱턴 타임스(WT), 브레이트바트 등이다. AP 통신과 타임은 확대 개글에 초대를 받았지만 초대받지 못한 언론사와 연대를 이유로 참석을 거부했다.
백악관 브리핑에서 기자들이 많은 정보를 얻는 게 결코 아니다. 브리핑 참석이 시간 낭비라며 인턴을 보내는 기자도 있다. 그렇지만 언론인 사라 포스너는 워싱턴 포스트 칼럼을 통해 “백악관 브리핑룸은 국정 현안의 자초지종을 따지는 공개된 무대이고, 이 무대의 막을 내리려는 시도는 민주주의에 대한 위협이다”라고 주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