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서지에서 '국정 토론회' 여는 핀란드인들

[글로벌 리포트 | 핀란드] 최원석 YTN 기자· 핀란드 라플란드 대학교 미디어 교육 석사전공

핀란드 사람들도 여름이면 피서를 간다. 아주 긴급하고 중요한 업무가 아니라면 보름씩 연락도 받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이메일을 보내면 8월 둘째 주까지 자리를 비운다는 자동회신을 받는다. 시내에선 사람 구경이 어렵지만, 캠핑장과 휴가지는 북적거린다. 각종 축제가 열리는 몇몇 도시에는 ‘핀란드 사람 다 모였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인파가 모인다. 기온 20도 이상인 여름날이 1년 중 며칠 되지 않으니, 이때만큼은 원 없이 마시고 춤춘다.


이렇게 핀란드인이 모이는 도시 중 하나인 ‘포리’(Pori, 핀란드어 발음은 뽀리)를 소개한다. 헬싱키에서 서쪽으로 230km 떨어진 항구도시 뽀리는 50년 역사 ‘뽀리 재즈 페스티벌(Pori Jazz Festival)’의 고향이다. 주요 도시에서 서너 시간이면 닿는 이점 때문인지, 2010년에는 이 도시 인구 2배 수준인 관람객 15만명을 기록했다. 한국에선 매년 10월 열리는 ‘자라섬 재즈 페스티벌’이 뽀리 축제를 본받았다. 기획자 인재진 총감독이 2001년 이곳에 처음 방문한 뒤 2004년 경기도 가평을 골라 축제를 시작했다. 인 감독의 배우자, 재즈 보컬리스트 나윤선도 2003년 공연했다. 두 사람이 만난 곳이 뽀리다.


그런데 재즈 축제만으로도 북적거리는 시기, 뽀리에선 ‘쑤오미 아레나(Suomi Areena, 핀란드 광장)’라는 이름의 사회현안 토론회가 함께 열린다. 재즈 축제가 열리는 주간 매일 각계 전문가와 시민들이 만난다. 경제, 교육, 복지, 국방 등 반 년 분량 주요 뉴스를 모두 모은 듯한 다양한 주제들이 토론거리다. 올해엔 ‘기본 소득’과 같은 최신 현안을 비롯해 독립 100주년 핀란드의 ‘미래’를 논의하는 크고 작은 토론회가 170여 개. 사울리 니니스뙤(Sauli Vainamo Niinisto) 대통령을 포함한 정치인과 공무원, 노키아(Nokia)와 같은 기업 대표들이 시내 곳곳에 돌아다녔다. 시민들은 관심사를 찾아다니며 이야기 듣고, 발언 기회를 얻어 패널에게 직접 질문하기도 했다. 재즈 페스티벌 시기에 맞춰 지난 2006년 처음 열린 이 행사에 올해는 7만4000여 명이 방문한 것으로 집계됐다.


워낙 많은 사회 각계 인사가 모이다 보니 핀란드 언론사 기자들은 되레 바쁘다. ‘무장 해제’ 상태로 돌아다니는 유력 관료를 인터뷰하려고 뛰어 다니기 때문이다. 나도 아동교육 관련 토론회에서 전직 대통령 따르야 할로넨(Tarja Halonen)을 만날 수 있었다. 할로넨 전 대통령은 소박한 차림새로 토론을 경청했고, 끝난 뒤 인사를 건네는 시민들과 편안하게 대화했다. 기본 소득 관련 주요 인사인 재무부 사무차관 마르띠 헤테마끼(Martti Hetemaki)를 만나기도 했다. 신문사 헬싱긴 사노맛 기자들이 그를 붙잡아 페이스북에 인터뷰를 생중계했는데, 뒤에 물어보니 같은 인물이라도 헬싱키보다 이곳에서 인터뷰하기가 훨씬 편하다고 말했다.


주요 방송사인 MTV는 이런 각계 인사들이 토론하는 현장을 모두 생중계 하거나 온라인으로 내보낸다. 텔레비전이나 휴대전화 앱으로 토론회를 실시간 시청할 수 있다. 낮에는 머리를 맞대고, 밤에는 재즈 공연을 감상하는 ‘피서지 공론장’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특정 현안에 대해 투표하거나 결정하는 자리는 아니지만, 공개적인 논의와 토론만으로도 충분히 사회적인 의미를 가진다고 느꼈다. 이런 휴가지 토론회를 한국에서 열면? 우리 전·현직 대통령이나 기업인들도 꼭 토론회에 참석하면 좋겠다. 이 전 대통령과 함께 하는 낙동강변 토론회는 어떨까. 정치든 경제든 워낙 속쓰린 현안이 많아, 더위 식히러 갔다가 열 받는 불상사가 생길 수는 있겠다.


핀란드식 ‘피서지 토론회’를 한국 언론사에 제안한다. 휴가지에서 누가 무슨 책을 읽는다는 고전적인 기사보단, 직접 무슨 생각을 가졌는지 들어봤다는 기사가 더 흥미롭지 않을까. 청와대에서 이미 공론장 개념을 빌려 ‘광화문 1번가’를 열고 있으니, 여름에는 교통편 좋고 즐길 거리도 있는 도시를 골라 토론회를 진행하는 건 어떨까. 여름마다 국제음악영화제가 열리는 제천, 바닷가 곳곳 경치 좋은 태안반도, 혹은 2018년 동계올림픽이 끝나면 한적하게 변할 강원도 평창도 나쁘지 않겠다. 한번 쓰고 용처를 찾지 못한 시설도 많으니 후보지는 여러 곳에 있다. 얼마나 터놓고 이야기할 지가 문제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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