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성-언론 유착과 언론위기의 본질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세기의 재판’으로 불린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뇌물사건에 대한 1심 선고에 국민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법원이 25일 1심 선고일에 생중계를 허용할 가능성도 높은 편이다.


이 부회장과 삼성 전·현직 임원 등 5명은 박근혜 전 대통령과 최순실씨 등에게 433억원의 뇌물을 제공하거나 약속한 혐의를 받고 있다. 특검은 이번 사건을 전형적인 정경유착으로 규정하며, 이 부회장에 징역 12년의 중형을 구형했다. 이 부회장이 경영권 승계 작업에서 박 전 대통령의 도움을 받는 대가로 최씨 모녀 등을 지원한 혐의다.


삼성 쪽은 지원 사실은 인정하지만, 뇌물이 아니라 강요와 협박에 의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변호인단은 한 술 더 떠 경영승계 작업 자체를 부인한다. 최지성 전 삼성 미래전략실장(부회장)은 정유라씨 등에 대한 지원을 자신이 직접 결정했다며 ‘이재용 구하기’에 나섰다. 이 부회장도 그룹의 주요 의사결정은 미래전략실에서 주관해 자신은 몰랐고, 삼성물산 합병으로 국민연금에 손해를 입히거나 개인적 이득을 취하지 않았다며 눈물을 흘렸다.


삼성이 2014년 5월 이건희 회장의 갑작스런 와병 이후 빠르게 진행해온 경영승계 작업을 원천 부인하고, 이 부회장이 삼성의 최고 의사결정권자가 아니라고 주장한 것은 1심 선고에서 유리한 결과를 얻기 위한 일종의 재판전략이다. 하지만 당장 시민단체들로부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억지라는 비판이 쏟아졌다. 박영선 더불어민주당 의원은 “이 부회장이 바보를 자처한다”고 꼬집었을 정도다. 삼성의 한 전직 임원조차 “이 부회장이 지난 3년 반 동안 그룹의 주요한 의사결정에 일체 관여하지 않고, 심지어 경영승계 작업도 하지 않았다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한 것이냐”고 혀를 찼다.


하지만 대다수 언론은 이런 여론에 귀를 막은 채, 특검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부족하다는 삼성 쪽 주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는 데 앞장섰다. 일부 언론은 삼성 스스로 ‘이재용 바보론’을 주장하는 상황인데도 이 부회장의 장기 경영공백에 따른 우려를 강조하는 기사를 올려 손가락질을 받고 있다.


때마침 ‘장충기 문자’에 대한 <시사IN>의 단독보도가 터졌다. 삼성 미래전략실의 2인자였던 장충기 사장에게 광고를 청탁하면서 기사로 보은하겠다고 다짐하는 언론, 아들의 취업이나 자신의 자리를 청탁하는 언론, 마치 삼성 직원인 것처럼 삼성의 안위를 걱정해주는 언론의 낯 뜨거운 행태는 큰 충격을 던져줬다. 언론이 재벌광고에 목을 매는 현실은 이미 공지의 사실이지만, 언론이 더 이상 ‘사회적 거울’로서의 역할을 포기한 채 ‘밥벌이 수단’으로 전락해가는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줬다.


대다수 언론 종사자들은 한국 언론이 위기상황임을 인정한다. 갈수록 심해지는 국민의 방송·신문 외면, 디지털 중심의 급속한 언론환경 변화 등이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꼽힌다. 하지만 삼성 사태를 통해 드러난 ‘언론과 삼성의 유착’은 언론위기의 또 다른 원인을 보여준다. 국민 여론은 온라인에서 언론에 대한 성토로 들끓고 있는데 신문과 방송은 침묵으로 일관하고, 텔레비전과 지면에서 관련기사를 찾아보기 힘든 현실이다. 국민에 대한 신뢰회복과 내부 혁신 노력이 없는 한 언론의 회생은 불가능하다. 그런 점에서 이명박·박근혜 정권과의 유착을 반성하고 방송 정상화를 요구하는 MBC와 KBS의 제작거부는 한국 언론에 아직 희망의 불씨가 꺼지지 않았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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