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정보유출과 취재원 보호

[글로벌 리포트 | 미국] 국기연 세계일보 워싱턴 특파원

미국의 워싱턴포스트(WP)가 지난 3일(현지시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엔리케 페냐 니에토 멕시코 대통령, 말콤 턴불 호주 총리와 통화한 녹취록을 원문 그대로 보도했다. 백악관 직원이 기록한 이 녹취록을 정제되지 않은 상태로 입수했다고 WP가 밝혔다.


이 대화록을 보면 트럼프 대통령이 니에토 대통령에게 “미국-멕시코 국경 장벽 건설 비용을 멕시코가 댄다고 해라”고 거짓말을 강요하는 대목이 나온다. 그가 턴불 총리에게 “당신과 통화가 최악이야”라고 막말을 퍼부은 사실도 확인됐다.


이 녹취록은 트럼프 정부에서 기밀 정보가 언론에 줄줄 새나가고 있는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과 백악관이 화들짝 놀라는 것도 이해할 만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진상 조사를 지시했고, 제프 세션스 법무부 장관은 정보 유출에 따른 법적 대응 방침을 밝혔다. 세션스 장관은 비밀 정보를 보도한 기자를 대상으로 소환장(subpoena)을 발부할 수 있다고 으름장을 놓았다. 언론인보호위원회(CJP) 등 언론 단체들은 트럼프 정부가 언론 자유를 말살하려 든다고 강력히 반발하고 있다.


이 사건을 계기로 미국에서 정보 유출과 취재원 보호 문제가 정치권과 언론계의 핵심 이슈로 부각됐다. 기자가 취재원을 보호할 수 있는 법적 한계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고 있다. 세션스 장관은 “언론 자유가 무제한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라면서 “국가 안위를 저해하고, 특정인의 생명을 위험에 빠뜨리면 처벌하지 않을 수 없다”고 주장했다. 세션스 장관은 국가 기밀 사항 유출 사건을 수사하면서 법원이 언론인에게 소환장을 발부하면 이에 응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소환장을 받은 기자는 법정에서 취재 경위와 취재원 공개를 강요받게 마련이다. 특히 소환장 발부 대상자가 되면 기자와 취재원 간 통화, 이메일 교환 내용 등이 수사 대상 리스트에 오르게 된다. 이 때문에 미국의 언론단체는 헌법에 보장된 언론 자유를 지키려면 기자가 언론 보도를 이유로 소환장을 받아서는 안 된다고 맞서고 있다.


지난 2005년에 뉴욕타임스 기자 주디스 밀러(Judith Miller)가 기밀 정보 보도를 이유로 소환장을 받은 적이 있다. 밀러 기자는 소환에 응하지 않았고, 법정 모욕죄로 기소돼 복역하다가 2개월 반 만에 원고 측이 밀러 기자 증언 요구 권한을 보류하는 형식으로 풀려났다.


미국에서 ‘취재원 보호법’과 같은 법적 장치가 완비돼 있지 않고, 기자의 취재원 공개 거부에 관한 대법원 판례도 명쾌하게 나와 있지 않다고 포린 폴리시(FP)가 최근 보도했다. 미국 헌법은 정부가 언론과 표현의 자유를 침해할 수 없도록 했으나 기자에게 취재원 공개를 거부할 수 있는 ‘특권’을 부여하지는 않고 있다.


미 대법원은 지난 1972년 ‘Branzburg v. Hayes’ 판결에서 제1 수정헌법에 따라 기자에 대한 법정 모욕죄 적용 예외를 포괄적으로 인정하지 않되, 사안의 성격에 따라 기자가 취재원 공개를 거부할 수 있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 미 연방대법원은 2014년 5월 수사 자료를 입수해 범행 내용을 보도한 폭스뉴스 재나 윈터 기자에게 취재원 공개를 거부할 권리가 있다는 취지로 판결을 내리기도 했다. 워싱턴 DC 순회법원도 “기자의 취재원 공개 거부를 인정하지만, 이것이 절대적인 것은 아니다”라고 판결했었다.


미국 정부와 언론계는 1970년대 이후 정보 유출과 취재원 보호 문제에 관한 ‘신사협정’을 지키고 있다고 FP가 전했다. 행정부는 기밀 정보 유출 사건이 발생해도 기자에 대한 소환장 발부를 추진하지 않는다. 기자는 그 대신 국가 안보나 공공의 이익을 위협하는 정보를 보도하지 않는다. 트럼프 정부는 이 불문율을 깨고, 법무부 지침 개정을 통해 기자에게 소환장을 발부하려 들고 있다.


한국에서도 지난 2014년 말 세계일보의 ‘정윤회 문건’ 보도 등을 계기로 정보 유출과 취재원 보호에 관한 법적 정비 작업 필요성이 제기되고 있다. 미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자 대상 소환장 발부 문제의 처리 과정이 한국에 반면교사가 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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