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다른 나라와 협상을 통해 국가 이익을 최대화하는 국가 차원의 노력이다. 그런데 특정 외국과 갈등 상황을 계기로 해당 국가를 겨냥한 집단적 증오 표출이 외교 정책의 요체로 둔갑하는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최근 보통 시민도 외교관 역할을 하는 상황이 잦아지면서 의도와 달리 증오 표출이 관심사가 되고, 결국 국익 훼손으로 이어지는 사례도 자주 발생한다.
지난 7월 뉴욕 타임스퀘어 군함도 홍보물 오류 파문에도 시민 외교의 증오 표출 요소가 포함돼 있다. 일제 시기 한국인 강제징용의 부도덕성을 고발하기 위해 설치한 대형 광고판에서 사용한 사진이 오류였다는 사실이 알려졌고, 일본 우익세력이 가짜뉴스 운운하면서 역공세 소재로 활용한다는 것이 주요 내용이다. 이 상황은 홍보 책임자가 부주의해서 벌어진 해프닝으로 처리됐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다양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첫째, 한국인이 일본을 규탄하는 캠페인을 미국에서 전개하는 것은 효과적이지 않다는 점이 여전히 간과되고 있다. 미국인은 한일 대결이 벌어지면 회피할 가능성이 높다. 한국과 일본, 모두 미국의 주요 우방이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지만, 군함도 문제를 인류 보편적인 노동자 인권 탄압 사례로 접근했다면 상황이 달라진다. 미국 지식인은 세계 최강대국 엘리트로서 인류 문명의 발전을 위해 기여해야 한다는 책임 의식을 갖고 있고, 관심 대상 범위는 시간과 국적을 초월한다. 셋째, 만약 군함도 문제를 노동자 인권 문제로 처리했다면, 조선인은 물론 일본인도 피해자가 될 수 있다는 구도가 나온다. 국적이 문제가 되지 않고, 광고판 사진에 일본인이 등장한 것이 오류가 아니게 된다. 그렇다면, 일본 제국주의 규탄이라는 당초 목표는 무산될 것인가? 그렇지 않을 것이다. 군함도 인권 탄압을 규탄하고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노력에서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규탄은 불가피하다.
이와 반대로 특정 국가에 대한 적개심을 인류 보편적 가치를 옹호하는 캠페인으로 승화시켜서 성공한 사례가 적지 않다. 지난 2007년 미 의회 위안부 결의안 채택을 위한 캠페인에서 김동석 뉴욕 시민참여센터 이사는 위안부 문제를 한일 감정 대결이 아니라 여성 인권 침해 사건으로 규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 결과 일본계 미국인 마이클 혼다 의원의 적극적 지원을 확보했고, 기대를 뛰어넘는 쾌거를 만들어냈다. 지난 2014년 미국 버지니아 주가 동해 병기를 명문화하는 법률을 채택한 것도 유사한 사례다. 캠페인을 주도한 ‘미주 한인의 목소리’ 피터 김 회장은 미국 정치인이 한일 역사 분쟁에는 끼어들지 않지만, 지리 명칭에 대한 교육 문제에는 관심이 있다는 사실을 간파했다. 결국 철저하게 교육 문제로 접근한 결과 버지니아 주 당국은 동해 병기를 법률로 규정했다. 두 가지 사례 모두 일본에 대한 한국인의 적대감 표출, 또는 일본 망신주기 이벤트로 접근했다면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한국은 다른 나라에 비해 민족주의가 발달했고, 그러다보니 민족주의에 편승해서 특정 국가에 대한 증오심을 출세나 돈벌이 수단으로 삼는 경박한 사업가나 음흉한 야심가도 끊임없이 나타나고 있다. 그렇지만, 민족주의를 개인 출세에 활용하는 것은 그 자체로 국민을 배신하는 행위이고, 국가 망신을 자초할 수 있다. 민족주의의 이름으로 민족의 명예를 훼손하는 역설이 생겨나는 것이다. 이와 반대로 인류 문명 수준을 높이는 캠페인에 주목한다면 적어도 의미 있는 사회 운동을 한다는 명예는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언론도 이제는 다른 민족에 대한 저항과 반발에만 주목하는 편협한 민족주의보다는 인류 보편적 가치에 주목하면서 우리 민족이 선도하는 고품격 민족주의에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