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가 되고 나면 고민의 순간이 찾아온다. 이메일 아이디를 어떻게 정하느냐다. 수습 시절 만든 아이디는 기자로 사는 내내 이름 뒤에 붙어다닌다. 매일 기사작성 프로그램에 로그인할 때마다 입력해야 하는 것도 그 아이디다.
이메일 주소를 불러줄 일이 많은 기자들은 짧고 쉬운 아이디가 가장 좋다고 말한다. 그럼에도 의미 있는 아이디로 자신의 정체성을 표현하는 이들도 있다.
기자들의 이메일 아이디를 살펴보면 크게 이니셜형, 재치형, 의미부여형으로 나눌 수 있다. 이니셜은 가장 흔한 방식이다. 이름 석자 앞의 스펠링을 조합하거나 영문 이름을 짧게 표기하는 식이다. 중앙일보는 회사 차원에서 ‘성.이름’ 형식을 권장해 상당수 기자들이 영문명을 아이디로 쓰고 있다.
재치형은 말 그대로 재미있는 아이디다. 박대기 KBS 기자가 대표적이다. 2010년 폭설 현장을 중계하던 그는 온 몸에 쌓인 눈과 이메일 아이디 ‘waiting(대기)’으로 화제가 됐었다. KBS의 최선중 기자(best-ing), 안양봉 기자(beebee), 김난영 뉴시스 기자(imzero) 등 이름을 재밌게 표현한 기자들도 많다.
반준환 머니투데이 기자의 ‘abcd’도 눈에 띈다. 그는 “쉽지만 독특한 아이디를 갖고 싶었다”며 “많은 고민 끝에 결정했는데 2002년 입사 당시 선배들에게 성의 없다, 건방져 보인다는 소리를 들었다”며 웃었다. 반 기자는 “취재원에게 불러주기 편하고 누구나 한 번만 들어도 기억할 수 있다. 왠지 쿨해보이는 느낌도 든다”며 만족감을 드러냈다.
‘007’을 쓰는 김선영 세계일보 기자는 특이한 아이디 때문에 겪은 에피소드가 많다. 김 기자는 “경찰행정학과여서인지 007 영화를 좋아했다. 마침 사번 뒷자리도 007이어서 그걸로 정했다”며 “첫 출입처가 국방부였는데, 여성스러운 이름이 군 관련 기사를 쓰고 아이디도 007이니까 ‘여기자가 국방에 대해 뭘 아느냐’는 댓글이나 메일을 받곤 했다. ‘ROTC 출신으로 국방의 의무를 다한 남성’이라고 답장을 보내기도 했다”고 설명했다.
실용적인 면은 떨어지더라도 기자로서 소명이나 의미를 담은 아이디도 돋보인다. 류란 SBS 기자의 아이디는 ‘peacemaker’, 직역하면 평화를 만드는 사람이다. 류 기자는 “사실 신입기자 교육을 받으면서 무의식적으로 적어냈다. 처음엔 아이디가 너무 길어서 후회한 적도 있다”면서도 “문화부 종교담당 할 때 신부님, 스님들이 아이디를 좋아했다. 사건팀 때는 ‘피스메이커가 조지는 기사 쓴다’는 농담을 듣기도 했다”고 말했다. 류 기자는 “큰 고민 없이 정했지만 실제로 누구랑 싸우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며 “의미를 담은 아이디는 기자의 정체성과 결부된다는 생각이 든다”고 덧붙였다.
이재훈 뉴시스 기자(realpaper7)는 의지를 담았다. 이 기자는 “웹기반의 통신사에서 일하고 있지만 보통 언론하면 떠오르는 지면(paper) 앞에 참(real)을 붙여 참언론이 되겠다는 포부였다”며 “매일 정신없이 기사 쓰다가 가끔 바이라인을 보면 동기들이랑 아이디를 만들었던 그때가 떠오른다. 입사 10년차인데, 잠시라도 지난 시간을 되돌아볼 기회를 가져야겠다”고 말했다.
‘누군가를 위하는 기사를 쓰겠다’는 목표를 아이디(foryou)로 표현한 박세환 국민일보 기자. 그는 “입사할 때 다들 멋있는 걸로 만들어보자고 했었다. 선배들이 ‘기사는 사람에게서 나온다’고 말해준 게 떠올라 foryou로 정했다”며 “아이디에서 인간적인 느낌도 나는 것 같다. 제보 메일이 동료들보다 더 많이 들어오는 편”이라고 설명했다.
안충기 중앙일보 기자는 매일 새롭게 살자는 다짐을 ‘newnew9’라는 아이디에 담았다. 안 기자는 “이름이 자기 자신을 규정하지 않느냐”며 “오래전에 지은 아이디인데, 스스로 그렇게 하자고 정해놓으니까 진짜 그렇게 살게 되는 것 같다”고 전했다.
고참 선배인 안 기자의 말대로라면, 올해 입사한 김민성 전북CBS 기자도 아이디 ‘whaleshark(고래상어)’처럼 살아갈 수 있을까. 김 기자는 “어렸을 때부터 고래상어를 좋아했다. 지구상에서 가장 큰 어류인데 성격은 온순하다”며 “고래상어는 갓 태어났을 때 40~60cm에 불과하지만 죽을 때까지 성장해 20m에 이른다. 계속해서 성장하는 기자가 되고 싶다”고 포부를 밝혔다.
김달아 기자 bliss@journalist.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