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핵 보도와 경마 저널리즘

[언론 다시보기] 김진혁 한국예술종합학교 방송영상과 교수

연일 계속되는 북한의 도발과 이에 맞선 트럼프의 강성 발언은 “에이 그래도 설마 전쟁 나겠어?”라고 생각하는 남한의 많은 시민들에게도 어쩌면 예전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불안감을 주고 있다. 전술핵이니 핵잠수함이니 선제타격이니 하는 무시무시한 말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포털의 뉴스 카테고리를 떠다니는 모습은 마치 내일 당장 국지전이 벌어진다고 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그에 반해 북한의 김정은이 핵 개발을 통해 궁극적으로 얻고자 하는 것, 예를 들어 미국으로부터의 인정, 그리고 이를 통해 현 북한 지도부를 주축으로 한 국가로서의 유지 존속과 같은 부분에 대해서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알려져 있지 않다. 특히 현재 상황만으로 보면 김정은의 지속되는 북핵 도발을 막을 실질적 방법이 마땅치 않아 보이는데, 그렇다면 과연 경제봉쇄 이후 어떠한 단계의 추가 해법이 가능한지, 만약 계속 압박해도 북한이 버틴다면 정말 북한의 핵을 인정해야만 하는 것인지, 그런 상황이 온다면 과연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와 같은 것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고 있지 않다.

 

의제 설정의 모든 잘못을 언론에 돌리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이번 북 핵 보도에서 언론이 보여주는 태도가 오래된 관습에 여전히 갇혀 있어 보이는 건 분명하다. 그리고 그걸 한 마디로 표현하면 ‘경마 저널리즘’이라고 할 수 있다.

 

큰 사건이 발생하면 당연히 언론은 ‘단독’과 ‘속보’에 목을 맬 수밖에 없다. 그건 언론의 속성이다. 하지만 속보 경쟁은 사건 초기로 충분하다. 그 시기가 지나면 그보다는 사건의 ‘함의’에 대해 파고들어 사건이 피상적으로 흐르지 않도록 해줘야 하는 게 언론의 역할이다. 더구나 ‘핵’이 아니던가? 우리 모두의 생명을 담보로 벌어지는 이런 일에 대해 단순히 김정은과 트럼프의 입을 중계하는 것은 너무나 무책임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경마 저널리즘이란 말을 떠올릴 때마다 개인적으로는 황우석 사태가 겹친다. 황우석이란 인물 개인 혹은 그의 업적에 대하여 너나 할 것 없이 칭송을 했던 언론은, 그 결과 황우석 신화를 만들어 냈고 대중을 그 신화에 매혹당하도록 만들었다. 하지만 막상 그 신화가 깨어지게 되자 대부분의 언론은 그에 대한 책임커녕 오히려 자신들이 생산한 신화에 매몰되어 빠져나오지 못하는 대중들을 어리석다는 투로 비판했다. 

 

이는 단순히 언론의 자세가 올바르지 않다는 것에 대한 문제로 그치지 않는다. 얼마 전 낙마한 모 본부장은 결국 황우석 박사 사건에 대한 관련성이 그 이유였는데, 이는 바꿔 말해 그 당시 언론이 생산한 황우석 신화가 합리적으로 정리되거나 해소되지 못하고 애매하게 봉합되어졌음을 의미한다. 경마 저널리즘의 근본적 문제가 단순히 속보 경쟁이나 받아쓰기에만 있는 게 아니라, 언론이 기본적으로 짚어내야 할 ‘사실 관계 확인’에 대한 누락까지 이어짐을 보여주는 것이다.

 
좀 확장해서 보면 각종 구조적 비리, 예를 들어 방산비리와 같은 것들 역시 언론의 경마 저널리즘적 태도와 무관치 않다. 물론 비슷한 비리가 반복되어졌을 때 그것을 해결해내야 할 주체는 당연히 해당 분야다. 하지만 대개의 사회적 문제 해결은 그 출발과 과정에 있어 언론의 의제 설정에 크게 의존하는 점에서 자극적이고 선정적인 보도에 초점이 맞춰지게 되면, 그러니까 그저 총알이 뚫리는 방탄복과 같은 기사를 경쟁적으로 보도하게 되면 비리의 구조적 문제가 포함된 핵심적인 맥락은 자연스레 뒤로 밀리게 된다.

 

사실 이런 문제는 기성 언론의 오랜 약점이기도 했다. 문제는 이제는 시청자들이 과거와 달리 ‘맥락’을 지루하다고 느끼기보다는 좀 더 많이 알고 싶어 한다는 점이다. 기성 언론의 스타일에 비춰 볼 때 지나치게 주절거리는 것처럼 보이는 팟캐스트나, 짧고 빠른 꼭지식 보도에 비해 너무 긴 시간을 할애하는 모 방송사의 앵커 브리핑이 시민들로부터 좋은 평가를 얻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다. 경마 저널리즘은 그런 면에서 더 이상 윤리적 문제에만 국한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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