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상화폐, 오만한 기성 금융·화폐 권력에 대한 테러

[스페셜리스트 | 금융] 유병연 한국경제신문 차장·신문방송학 박사

지난 300여 년간 발권력이란 ‘전가의 보도’를 휘둘러온 중앙은행 제도가 도전받고 있다. 가상화폐가 들불처럼 번지면서다. 발단은 글로벌 금융위기가 한창이던 2008년 10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나카모토 사토시라는 정체불명의 저자가 암호화기술을 다루는 한 인터넷 사이트에 ‘비트코인: P2P 전자화폐 시스템’이라는 제목의 논문을 올렸다. 개인과 개인이 은행과 같은 중개기관을 통하지 않고도 송금·결제를 할 수 있는 블록체인 기술에 관한 내용이었다. 그는 이듬해 직접 ‘비트코인’이라는 가상화폐를 개발해 기술을 구현했다.


당시는 시장 실패에 따른 금융위기를 타개하기 위해 미 중앙은행(Fed)이 무차별적으로 달러를 뿌려대던 시기였다. 이 여파로 달러 가치는 급락했고 달러 중심의 글로벌 화폐 권력에 대한 신뢰도 땅에 떨어졌다. 비트코인은 각국 중앙은행이 화폐 발행을 독점하고 자의적인 통화정책을 펴는 것에 대한 반발로 고안됐다. 애당초 총발행량의 한계를 내재해 인플레이션 가능성을 차단한 데에서도 비트코인의 ‘반항 정신’이 엿보인다. 사토시 스스로도 중앙은행의 역할에 대한 불신과 그에 따른 경제위기에 대한 비판을 제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가 비트코인의 발로임을 천명했다.


비트코인은 달러 등 기성 화폐와 달리 중앙권력이 존재하지 않는다. 대신 개인이나 기업이 화폐를 제공하면 사용자들이 가치를 부여하고 자생적으로 생겨난 거래소 등이 거래를 지원한다. 방대하게 얽힌 네트워크 공간에서 혁신적인 아이디어를 제시하면 이용자들의 공감을 통해 새로운 화폐권력을 형성하는 구조다. ‘화폐는 국가의 고유한 창조물’이라는 케인즈의 명제나 크나프의 ‘국가 화폐설’은 가상화폐 앞에 무력화되고 만다. 비트코인의 등장이 주류 금융에 대한 ‘저항’이자 오만한 중앙은행 제도에 대한 ‘항거’로 평가받는 이유다.


비트코인이 발행된 지 9년이 지난 지금 국내에서도 ‘비트코인의 후예’들이 우후죽순처럼 등장하고 있다. 가상화폐를 활용해 사업자금을 조달하는 스타트업(창업초기기업)들이 늘어나면서다. 회사는 독자적인 가상화폐 발행을 통해 사업 초기 자금을 확보하고, 투자자는 사업이 성장하면 연계된 가상화폐 가치가 급등할 것이란 기대감에 투자한다. 가상화폐가 자본시장으로 영향력을 넓히는 모습이란 평가다. 이 과정에서 가상화폐의 무정부적 자유 가치는 인간의 탐욕과 조우하며 일탈 조짐을 보이고 있다. 일확천금을 꿈꾸는 뭉칫돈들이 몰리면서 ‘카지노 자본주의’를 재연하고 있다. 법도 규제도 없는 사각 지대에서 투기꾼들의 놀이터가 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하지만 한국은행, 기획재정부, 금융위원회 등 관련 기관은 2013년 12월 회의에서 비트코인은 화폐도 금융상품도 아니라는 안이한 판단을 내린 뒤 뒷짐만 지고 있다.


가상화폐는 중앙은행에 대한 불신 속에 네트워크 사회의 대안운동이 블록체인이라는 신기술을 만나 꽃핀 결과다. 1870년대 오스트리아학파의 탈 중앙은행 논의, 1971년 브레튼우즈 체제의 붕괴,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등 국가의 배타적인 화폐 통제권은 과거에도 몇 차례 도전을 맞았지만 가상화폐처럼 위협을 가한 적은 없었다. 가상화폐를 잉태한 탈 권위와 권력분산 요구는 포용하되 ‘일탈’을 막는 게 글로벌 통화당국들의 당면 과제다. 한국 금융당국도 가상화폐에 어떤 법적 지위를 부여하고 어떻게 제도권으로 끌어들여 발전적 궤도에 올려놓을지를 진지하게 고민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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