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 한림원은 왜 하필 가즈오 이시구로를 올해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결정했을까. “위대한 정서적 힘을 가진 소설들을 통해, 세계와 닿아 있다는 우리의 환상 밑의 심연을 드러냈다”가 공식 이유다. 하지만 커튼 뒤 비공식 이유를 들춘다면 조금 달라지지 않을까.
우리 신문 지면에서 한림원의 이전 선택과 이번 선택을 비교하는 칼럼을 쓴 적이 있다. 지난 2년간 노벨문학상이 과격한 선택으로 논란을 자초했으며, 이번 유턴을 환영한다는 취지였다. 하지만 오늘은 기자도 커튼을 한 번 들춰보려 한다. 기자협회보는 ‘선수’들을 상대로 하는 매체니까. 나는 합리적 의심이라 생각하지만, 일종의 문학적 음모론이자 유쾌한 농담으로 읽어 주셔도 무방하다.
주지하다시피 지난해 밥 딜런이라는 선택은 ‘악성’에 가까웠다. 문학과 음악의 경계에 대한 의문이야 문화적으로 풍성한 화제를 이끌어낼 수 있겠지만,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에서 ‘표절 시비’를 일으킨 수상자는 전례가 없었으니까.
작품도 작품이지만, 한림원이 가장 고마워했을 대목은 가즈오 이시구로의 인터뷰였을 것이다. 발표 직후 인터뷰에서 이시구로는 이렇게 말했다. 밥 딜런은 나의 영웅이며, 영웅 다음 차례에 상을 받게 되어 영광이라고. 시상식장에서 밥 딜런 노래를 불러달라는 인터뷰어의 요청에 흔쾌히 답했다.
한림원으로서는 뜻밖의 선물을 받은 것일까.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뉴욕에서 발행하는 ‘파리 리뷰’라는 문학 전문지가 있다. 문학적 성취를 보편적으로 인정받은 작가와의 인터뷰로 유명한데, 단순히 신간이나 작가 홍보를 넘어, 소설 기법과 글쓰기 방식, 삶에 관한 진솔한 내용까지 포함한 길고 긴 대담이다. 문학 전문 독자라면 챙겨보는, ‘작지만 세상에서 가장 강한 문학잡지’이기도 하다. 1953년 창간된 이 잡지가 가즈오 이시구로와 인터뷰했던 시점은 2008년. ‘남아있는 나날’로 1989년 부커상을 받은 지 20여년이 지났고, 2005년의 ‘나를 보내지마’를 쓴 3년 뒤였다.
200자 원고지 70매에 달하는 이 긴 인터뷰에서 그는 예외적으로 록음악에 대한 자신의 애정을 간증한다. 밥 딜런과 레너드 코엔이 그 안에 있다. 셜록 홈즈에 탐닉했던 소년 시절 이후 그는 20대 초반까지 책을 읽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열광했던 게 음악. 열한 살부터 팝을 들었고, 자신의 용돈을 모아 난생 처음으로 산 음반이 열세 살 때의 ‘존 웨슬리 하딩’이었다. 밥 딜런의 음반이다. 그는 밥 딜런을 ‘위대한 작사가’로 추앙했고, “딜런을 통해 처음으로 초현실주의 가사와 만났다”고 다시 한 번 간증한다. 그리고는 밥 딜런에게서 영향을 받았다는 자신의 첫 노래 가사를 단숨에 소환했다. “그대의 눈은 다시 열리지 않으리. 우리가 한 때 살았고 놀았던 해변에서.”
다시 문학적 음모론으로 복귀한다. 한림원은 자신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을 것이고, 지난해의 소음과 잡음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리고 전통적 문학 독자들의 신뢰와 지지도 회복하고 싶었을 것이라 생각한다. 이 대목에서 안도의 한숨과 함께 발견한 텍스트가 가즈오 이시구로의 ‘파리 리뷰’인터뷰가 아니었을까.
문학은 궁극적으로 타인과의 경쟁이 아니라 자신과의 싸움이다. 일정 수준 이상의 경지에 오른 예술적 성취에 대해 우열을 가르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법. 그 중 한 작가에게만 월계관을 수여해야 한다면, 문학 이외의 판단이 개입하는 건 당연할 수 밖에 없다.
물론 오해는 마시기를. 기자는 제인 오스틴의 다변(多辯)과 카프카적인 꿈의 기억을 기품있는 문장으로 담아내는 올해 수상자의 작품을 진심으로 좋아하니까. 가즈오 이시구로로 돌아온 한림원의 선택을 다시 한 번 지지한다. 다행이다. 한림원을 위해서나, 문학을 위해서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