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하루를 살 것인가

[스페셜리스트 | 문화] 김빛이라 KBS 기자

“딱 한 달만 살고 오려고.” 친구가 제주도로 떠났다. 학창시절부터 남달랐던 그녀는 언제나 에너지가 넘쳤다. 하루 15시간, 햇빛도 보기 어렵다는 그 직장에 입사하기 전까지는 적어도 그랬었다. 일 년에 한두 번 모임에 나와서도 갈수록 말수가 줄고 시들시들 해지더니만 사표를 쓴 날, 제주 어느 바닷가에 빈 집을 빌려 살고 오겠다고 선포했다.


‘나도 여길 벗어나 산다면…’ 예능 프로그램 속 이효리 부부를 보면서 제주 생활을 동경하던 무렵이라, 친구의 실행력이 부러웠다. 옷가지와 책만 챙겨간 제주에서 활력을 되찾고 돌아온 그녀는 이제 이삼 년에 한 달쯤, 일상을 벗어나 생활할 수 있는 미래를 계획하면서 일자리를 구하는 중이다.


매일 같은 일상, 도시를 탈출해 딱 ‘한 달’만 다른 곳에서 살아보자는 열풍이 부는 요즘이다. SNS에서 ‘인생도시한달살기’를 검색하면 새로운 감성으로 현지인처럼 하루를, 한 달을 살아가는 이들의 단상을 쉽게 엿볼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내게도 배낭 하나 매고 떠난 곳에서 꼬박 한 달을 보낸 추억이 있다. 스물 한 살 여름, 프랑스 남부에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각국에서 모인 대학생들이 마을 회관을 보수하는 한 달짜리 유네스코 프로젝트. 가져간 거라곤 침낭 하나에 옷가지 몇 개가 전부였다. 당번을 정해 장을 보고 식사를 준비하고, 산등성이 위로 벽돌을 옮기고 페인트칠을 하고, 저녁 시간엔 산책을 하거나 운동을 했다. 그렇게 일주일, 열흘을 보내고 헤어지던 날 마을 주민들과 함께 찍었던 사진 속 나는 한 달 전과는 아주 다른 느낌이었다. 색다른 볼거리도, 사건도 없었지만 유럽 각지의 어느 곳을 여행할 때보다 더 많은 것들을 얻은 시간으로 추억된다.


짧지도 길지도 않은 ‘한 달’. 제한적이지만 새로운 일들이 일어나기에 충분한 시간이기에 참 매력적이다. 인간에게 끝을 부여한다는 건, 지금 이 순간의 가치를 알게 해주는 가장 큰 동력이라는 건 부인할 수 없다.


최근 독특한 타임 워프(time warp) 영화를 보고 왔다. 사랑에 빠진 두 남녀, 알고보니 서로 거꾸로 흐르는 시간대를 살고 있다. 여자의 세계에선, 남자와 정반대로 시간이 흐른다. 그러니까 이 남자가 겪은 어제의 기억은 여자에게는 아직 오지 않은 내일의 일이 되는 것이다.(제목도 ‘나는 내일, 어제의 오늘과 만난다’이다). 둘은 교차되는 시간을 살아가다 5년에 한 번, 오직 30일 동안만 함께할 수 있다.


미래를 보는 연인이 등장하는 ‘어바웃 타임’이나 ‘벤자민 버튼의 시계는 거꾸로 간다’ 류의 영화들과는 다른 방식으로 흘러갈 수밖에 없다. 둘의 시간 격차가 점차 벌어지다가 나이가 같아져 만나게 되는 30일에 집중하기 때문이다. ‘1일째’부터 ‘30일째’까지, 남자에겐 ‘처음’이지만 여자에겐 ‘마지막’부터 시작되는 이 시간이 더없이 애잔하게 느껴졌다. 제한된 30일, 엇갈리는 나이에 대한 비밀을 초반부터 열어뒀기에 자꾸만 흐르는 시간이 얼마나 야속하던지.


인상적인 건 오히려 남은 날짜를 세어가며 ‘오늘’에 더욱 집중하는 둘의 모습이었다. 시간뿐 아니라 그에 따른 감정선까지 거꾸로 흐르는 상황을 감내해가며 남은 하루하루에 집중하는 이들은 각자의 처음과 시작인 ‘한 달’이 결코 끝이 아님을 내비친다. 미래와 과거를 오가고, 한정된 시간을 다루는 작품들이 갈수록 많아지는 건 ‘어떤 하루를 살 것인가’ 고민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지고 있음을 시사하는듯하다.
내일, 모레, 아니 당장 1분 1초 뒤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는 지금이지만, 내게 앞으로 딱 한 달이 주어진다면 해야 할 것들, 하고픈 것들을 지금 해내며 산다면 그 자체로 행복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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