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상화의 길로 들어선 MBC가 공영방송 재건에 몰두하는 사이 3달째 파업을 이어가고 있는 KBS 상황이 여전히 안갯속이다. 고대영 KBS 사장은 방송법 개정을 사퇴 조건으로 걸고 사실상 버티기를 하고 있고, 함께 퇴진 압박을 받아온 이인호 KBS 이사장은 공영방송을 지키기 위해 사퇴하지 않겠다는 궤변을 늘어놓으면서 자리보전에 나섰다.
이인호 이사장은 지난주 입장문을 통해 공영방송의 공정성과 독립성 확보를 주장하며 사퇴는 없다고 못 박았다. 파업 중인 노조에 ‘방송장악 계획을 실천에 옮기려는 새 정권의 홍위병’이라는 원색적인 비난을 가하는가 하면, KBS 이사들의 업무추진비 사용 내역을 감사하고 있는 감사원에 ‘감사요원의 봉급과 활동비로 지출되는 혈세낭비야 말로 청산되어야 할 적폐’라는 발언도 서슴지 않았다.
이미 KBS 강규형 이사는 수백만 원에 이르는 업무추진비를 애견비용으로 사용해 물의를 빚었고, 이원일 이사는 업무추진비 2000여만 원을 자신의 회사 근처 식당에서 사용해 국민의 수신료를 개인의 쌈짓돈처럼 썼다는 비판을 받아왔다. 이처럼 KBS 이사들이 업무추진비를 사적으로 유용한 정황이 수차례 제기됐고, 시민들의 감사 청원이 이어졌는데도 이번 감사를 표적감사로 규정해 오히려 적폐라는 이상한 논리를 펴고 있다.
비상임 이사인 KBS 이사는 업무추진비 등의 명목으로 월 350만원을 지원받고 여기에 매월 이사회에 참석할 때마다 거마비 명목의 30만원을 더 받는다. 사용내역을 꼼꼼히 요구하지도 않는다. 독일의 공영방송들은 이사 활동비가 주의회 의원의 세비 기준 1/10에 불과하고, 영국 BBC는 이사들의 활동비 내역을 세세하게 홈페이지에 공개하도록 하고 있다. 이에 비해 우리 공영방송은 회사 운영 전반을 책임지고 있는 이사회 자체가 방만하다는 비판을 피하기 힘들다. 이번 감사를 계기로 공영방송 운영에 대한 고민과 개선이 필요한 시점에 KBS는 감사원에 감사 중단을 요구하는 한편, 역으로 노조가 이사들의 업무추진비 용처를 알게 된 경위를 내부 감사팀을 통해서 조사하겠다고 나섰다. 적반하장이 따로 없다. 지금까지의 잘못된 관행과 쌓여온 폐단을 끊고 새롭게 출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KBS 구성원과 시청자들의 열망을 송두리째 앗아간 셈이다.
이사진들의 도덕성 결여로 인한 문제를 언론의 독립성과 연결 짓는 KBS 이사장의 아전인수격 해석은 다분히 정치적이다. 진영논리 안에서 스스로를 정치적 피해자로 지칭하며 노조에는 ‘정권의 홍위병’이라는 색깔론을, 감사원에는 정치보복이라는 프레임을 덧씌우고 있다. 보수 일각에서 주장하는 정치보복 주장과도 맞닿아있다. 공영방송이 정치 중립적인 자세를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정치적 탄압이라며 이사회를 스스로 정치도구화하고 있는 셈이다. 이 같은 모순은 대중을 기만하는 행위다.
KBS 이사장이 쓴 입장문에 이런 구절이 있다. ‘모든 권력은 견제와 감시를 받지 않으면 반드시 부패한다는 것이 인류 사회의 보편적 역사적 체험에서 얻어낸 상식이며 문재인 정부도 예외일 수 없다.’ 되묻지 않을 수 없다. KBS의 사장과 이사장의 자리는 어떤 경우에도 지켜져야 하는 무소불위의 권력인가. 그동안 정권에 비판적인 인사의 방송 출연을 금지하고, 중요한 사회적 현안은 불공정 보도로 일관했던, 그리고 내부 비판에 대해서는 보복성 인사발령으로 공영방송의 독립성을 해쳐온 주체의 임기를 정치적 독립이라는 미명 아래 보장하는 것이 과연 타당한가. 국민의 방송으로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한 책임에서 자유롭지 않으면서 모든 정당한 비판을 거부한 채 스스로를 신격화한 KBS 이사장의 독선이 개탄스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