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 성역'이 정말 무너지려면

[스페셜리스트 | 경제]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경제학박사

곽정수 한겨레 경제선임기자 재벌들이 비상이다. 비리혐의로 잇달아 수사를 받고 있다. 조양호 한진 회장은 회삿돈 30억원을 자택 공사대금으로 유용한 혐의(배임)다. 김준기 전 동부 회장은 여비서 상습 성추행 혐의로 고소된 뒤 경찰의 출석 요구에 계속 블응하다가 체포영장이 발부됐다. 조현준 효성 회장은 계열사 부당내부거래와 비자금 조성 혐의로 자택과 사무실이 압수수색을 받았다.


일부에선 검경 수사권 분리를 노리는 경찰이 우호적인 여론 형성을 위해 재벌을 타깃으로 삼는다는 해석을 내놓는다. 실제 한진과 동부는 경찰이 수사 중이다. 경찰이 정치적 계산을 하든 말든, 없는 일을 지어낸 게 아니라면, 비난받을 일이 아니다. 재벌 성역이 유지되는 동안 재벌수사는 대부분 검찰이 도맡아 왔다. 검찰과 경찰이 선의의 수사경쟁을 하는 것은 재벌 성역 붕괴와 민주주의를 위해 바람직하다.


일부에선 정권 출범 초기 ‘재벌 길들이기’라는 의심도 한다. 새정부의 재벌개혁 입안자인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재벌에게 “사회와 시장이 바라는 방향으로 스스로 변화의 노력을 해달라”고 당부해왔다. 하지만 재벌은 납작 엎드려서 시간끌기를 하고 있다. 새정부 지지층에서는 개혁의 고삐를 좀 더 죄야 한다는 주문도 나온다. 하지만 새정부는 일회성 몰아치기식 개혁에 반대한다. 대신 정책의 일관성을 강조한다. 정권초기 ‘반짝개혁’을 했다가 곧바로 꼬리를 내리는 과거 정권의 구태를 반복하지 않겠다고 다짐한다.


재벌은 오랫동안 성역이었다. 하지만 최근 수년 새 많은 변화의 바람이 불고 있다. 2012년 최태원 SK 회장의 회사 투자금 횡령 사건, 2013년 이재현 CJ 회장의 배임·횡령 사건, 2014년 조현아 대한항공 부사장의 땅콩회항 사건, 2017년 이재용 삼성 부회장의 뇌물공여사건…. 이들 총수들은 모두 실형선고를 받았다. 예전에는 ‘3-5법칙(징역 3년·집행유예 5년)’에 따른 봐주기 판결로 풀려나기 일쑤였다.


문재인 대통령은 11월초 국회 시정연설에서 “국민 누구라도 낡은 질서나 관행에 좌절하지 않도록, 평등하고 공정한 기회를 갖도록 바꿔나가겠다”고 적폐청산을 다짐했다. 재벌이 성역으로 남아 있는 한 적폐청산은 요원하다. 재벌 3세들이 술먹고 행패를 부리거나, 부하직원이나 운전기사를 노예처럼 다루며 욕설을 퍼붓고, 심지어 폭행까지 해도 활개치고 다니는 세상에서는 적폐청산이 불가능하다.


재벌 성역이 사라지려면 기업 내부부터 변해야 한다. 삼성은 430억원대 뇌물을 공여한 혐의로 이재용 부회장이 5년 실형을 선고받았다. 반면 SK는 80억원을 요구받았으나 거절해 무사했다. SK 임원은 “지원사업 내용이 부실하고, 돈을 보내라는 방식이 수상했다”고 말했다. 내부 준법경영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면서 화를 면한 것이다. 하지만 최태원 회장은 최근 실트론 주식 인수로 다시 사업기회 유용 혐의를 받고 있다. 국정농단세력의 마수를 벗어나는 데 큰 공을 세운 준법경영 장치도 총수 관련 사안에는 제기능을 못한 셈이다. 10대그룹 임원은 “기업 안에서 총수관련 사안은 여전히 금기”라면서 “알기도 어렵고, 알아도 바른 말 하기는 더욱 어렵다”고 털어놨다.


재벌들은 오히려 역차별 받는다는 볼멘소리가 나온다. 하지만 재벌 성역이 아직 완전히 무너졌다고 보기는 힘들다. 우리 사회에서 “재벌보다 법이 위에 있다”는 원칙이 확고히 뿌리내려야 비로소 재벌 성역은 사라진다.


맨 위로